간이역에서의 단상

돈에 대한 단상

史野 2007. 3. 21. 22:22

어렸을 때부터 못 살았다. 그렇다고 뭐 밥을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친구들중에 내가 가장 가난했다.

 

그런데 가난이 내게 컴플렉스가 되지 못했던 건 그 어린 나이에 벌써 내가 혹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친구네들처럼 부자가 될 수 없단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노력해서 부자가 되자가 아닌 그냥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산다라는 인생관이 그때 생겼다..^^;;

 

초딩때 시골에서 올라온 사촌오빠가 자기는 나중에 사장이 될거라는거다. 그래서 어떻게 사장이 되냐니까 주식을 하나씩 하나씩 사서 결국 회사를 가질거라나. (그때는 주식이 붐일때도 아니었는데 이 오빤 어디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ㅎㅎ) 나보다 나이도 아주 많은 오빠였는데 어린 나는 속으로 참 한심하다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가난해서라기보다 엄마때문에 상처가 된 적은 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때 이모가 교복사라고 돈을 주셨는데 그 돈을 가로챈 우리 엄마는 내게 교복을 얻어다 입혔다. 동복이야 상관이 없지만 춘추복이나 하복은 하얀색이라 그 티가 확 나는데 사춘기시절 그게 얼마나 한이었는지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내 남자왈 우리 엄마는 정말 행동하나하나가 모든 교육학에 위배되었단다..ㅎㅎ)

 

고등학교때부터 사복이었길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우리엄마는 그때도 얻어다 입혔을거다..ㅜㅜ

 

저축도 그렇다. 이건 물론 자기변명이긴 하지만 세뱃돈이며 잘 모아놓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그걸 엄마가 다 뺏어갔다는 것. 그러니까 돈은 모아봤자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는 막내였던지라 이래저래 용돈을 받았기에 하고 싶은 것들을 좀 할 수 있었는데 그래봤자다. 나는 당시 삼만원짜리 나이키신발을 살 수도 없었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살 수도 없었다. 그건 내게 그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그 돈 자체가 내겐 어마어마한 금액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를 괜히 무수리과라고 부르는게 아니다...ㅎㅎ

 

대학들어가자마자 친한 친구는 아빠가 당장 오십만원짜리 너무 이쁜 바바리를 사줬는데 나는 그 바바리가 입고 싶다기보다 사람이 오십만원짜리 옷을 입을 수도 있는거구나란 사실에 충격받았다..^^;;

 

그로부터 이십년이 더 지난 지금도 (물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오십만원 넘는 옷이 있긴 있어도) 내게는 오십만원짜리 옷은 넘보기 힘든 가격이다. 오십만원을 어디 기부하라면 십분 고민하겠지만 오십만원짜리 옷을 사라면 한달은 고민할거다.

 

내게는 삼십만원대 가방이 몇 개 있는데 (거의 시어머님선물이다만) 어쨌든 현재 삼십만원짜리 가방을 몇 개 살만큼의 경제력은 된다.

 

그럼 사람들은 그걸 몇 개 사느니 백만원짜리 명품가방을 하나 사는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백만원짜리 가방은 못 산다. 내게 백만원짜리 가방은 딱 하나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백만원짜리 가방을 몇 개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들어야하는 물품이다. 거기다 삼십만원대 가방을 동시에 몇 개 사는 건 아니지 않는가.

 

백만원짜리 가방을 들려면 이백오십만원짜리 막스마라 코트같은 건 입어줘야할 거 아니냔 말이다.

 

내게 백만원이라는 돈은 단일품목에 낼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우리집에 있는 가구들 고르긴 다 내가 골랐지만 돈을 낸건 신랑이다.

 

그때 카메라도 DSLR사볼까 하고 갔더니만 펜탁스가 한국돈 백만원이더라. 그래 두 시간을 헤매다가 결국 삼십만원짜리 올림푸스하나 들고 들어왔다. 지금도 소파살 생각만 하면 머리가 찌근거리고 아프다. 신랑이 바쁘니까 내가 사야하는데 그런 돈을 낼 능력이 안된다.(아 이건 심리적 능력을 말한다). 결국 펜탁스보다 비싼 캐논 카메라를 신랑이 들고 나타났을 때 난 심봤다고 하지 않았냐...^^;;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내가 무지 알뜰한거 같은데 그건 또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뭐 팡팡쓰는 스타일도 아니다만 나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다. 아니 개념이 남과 다르다.

 

일단 차가 없는 나는 택시비를 아까와하지 않는데 만원버스나 지하철에 시달려야하는것보다 편안히 택시를 이용하는게 남들이 우러러보는 명품을 드는 것보단 내게 가치가 있기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비지니스석을 타고 유럽을 왔다갔다 해야하는데 일본에서 독일까지 비지니스석 표값은 사백만원돈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_-)

 

전화비도 그렇다. 지금이야 전화를 거의 안하지만 예전엔 전화를 싫어하는 신랑이랑 전화비때문에 엄청 싸웠는데 신랑이야기는 쓸데없이 전화비에 몇 십만원을 쓰지말고 차라리 그걸로 매달 가방이라도 하나 사라는 거다. 그런데 나는 가방보다는 친구들과의 국제통화가 훨씬 내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결혼전에 내 친구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오년동안 착실하게 천만원을 모았다. 당시 안양같은 곳 18평아파트가 육천만원 할때니까 물론 적은 돈은 아니지만 오년동안 천만원이다.

 

그런데 나는 일원한푼 저축안하고 그냥 이것 저것 배우고 음악회다니고 술마시고 여행다니고 책사보고 그랬다. 그러니 내 생활이 훨씬 여유롭고 행복했는데 친구는 지금도 그렇게 죽어라 돈을 모으고 살고 있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이건 이렇게 단순비교를 할 수 없는 다른 외적요소들도 많다만 그 근본내용이 변하는 건 아니다.

 

허영심을 위해 쓰는 게 아닌이상 돈은 쓰라고 있는 거다. 그래야 인생이 행복하다.

 

열심히 돈만 모은 사람은 돈이 많아져도 어디에 써야할지를 잘 모른다. 그러니 인생이 허무할밖에.

 

한국사람들이 실제로 못사는게 아닌데도 삶의 만족도가 많이 떨어지는 건 돈을 써야할 때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부부처럼 포도주 많이 마시고 이름은 전혀 못 외워도 좋은 포도주를 골라내는 사람들도 밖에 나가선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비싸서 포도주 안 마신다.

 

한국은 포도주값이 도쿄비교 1.5배에서 두배이상까지 차이가 나는데 그걸 레스토랑이나 와인바까지 가서 개나소나 다 마신다. 이러니까 한국사람들이 돈없다고 난리를 치는건 너무나 당연하다.

 

서양사람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시는 건 포도주가 싸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처럼 프랑스인에 포도주에 대해 민감한 견해를 가진 애도 유럽가격 '이만오천원'짜리 포도주를 내가 선물했더니 이런 비싼 포도주는 병으로 마시면 안된다고 카라페까지 꺼내던데 그게 정상이다. 물론 그 정도 포도주면 일본에서도 오만원정도니 진짜 비싼거다.

 

우리 여기서 지난 번에 보졸레누보 파티할 때도 일인당 삼천엔이 음식에 보졸레 누보 all you can drink가 포함된 가격이었다. 물론 불독커플 송별파티처럼 특별한 날은 그 커플것까지 해서 두당(이거 이야기했나. 독일어로는 한 코(nose)당 이라 이야기한다고? ㅎㅎ) 이만엔이나 냈다만 애들이랑 오는 길에 이런 말 독일가서 하면 사람취급 못받는다고 이런 건 그냥 주재원생활의 에피소드라고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아무나 포도주 마시면 안된다는 거다. 너는 마시면서 왜 난리냐고? 아무리 내 남자가 회사에서 연봉서열이 그지같고 어쩌고해도 내 남자는 주재원수당도 있으니 지금 돈 잘 번다. 거기다 여긴 포도주가 한국보다 훨씬 싸다. 그리고 위에 썼지만 우린 나가서는 포도주 안 마신다.

 

이것도 썼지않냐. 심지어 그 중요한 신년이 되는 날도 오만원짜리 샴페인 못사고 만이천원짜리 호주산 스파클링 와인 마신다고!!! 그건 내가 그런 특별한 날에도 오만원짜리 샴페인을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만원짜리나 만이천원짜리나 스파클링와인을 확연히 구별해낼만큼의 혀가 없기때문이다.

 

물론 오만원이 아무것도 아닐만큼 부자가 된다면 당연히 기분상으로도 프랑스산 샴페인을 마실거지만 말이다.

 

어찌 포도주쪽으로만 이야기가 흘렀는데 너도 나도 경제가 나쁘고 어쩌고, 얼마전에 BBC에까지 한국뉴스가 나오며 어느 한국남자가 경제가 하도 나쁘다 그러길래 황당해서 쓰는 이야기다.

 

경제가 나쁜데 해외여행은 미어터지고 구정연휴때 모든 관광지 호텔은 방을 구할 수 없고 평범한 사람들도 다 홈시어터 갖추고 살고 스키타러가고 오육만원짜리 포도주 마시고 그러냐?

 

중산층이 사라지고 양극화라고? 그건 C일보 논리다. 궁금한 건 못참는 나는 (한동안 다음소개글이 궁금한건 참지말라더만..ㅎㅎ) 블로그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어마어마한 글을 읽었더랬는데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블로그처럼 좋은 자료가 없다) 무슨 말씀. 다 잘 먹고 잘 산다. 심지어 임대아파트에 사는 어느 아주머니도 툭하면 외식이더라.

 

한국에서 누굴 초대할 일이 있어 빕스에 갔을 때 미어터지는 데 놀랐더랬다. 아 신문말대로 양극화라 돈많은 사람들만 오나보다 했다. 그런데 이것도 무슨 말씀, 블로그 다니다보니 개나 소나 무슨 일 있으면 다 가더라.

 

청년실업률이 사상최대치라고? 내가 어떤 인간인데? 혹은 엄마아빠가 자랑스런 회사다니라고 집에서 용돈 대주고 하니까 아무 일이나 안해서 그런거 아니냐.  

 

과연 각자의 선택이니 뭐라하면 안되는 걸까. 그리고 나중에 늙어 돈없는데 자살하고 자식대학 등록금없다고 자살하고  그러면 다시 사회문제되고 양극화의 심화니 어쩌니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거 아닐까.

 

얼마전에 대학생들의 양극화 어쩌고 하는 기사를 읽고도 웃음이 나왔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이십년 전에도 똑같은 이야기다. 위에 썼듯이 한 친구는 오십만원짜리 바바리코트를 입고 자기 생일이라고 강남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샀으며(걔네는 재벌도 아니었고 당시 피자는 요즘처럼 배달되는 음식이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선 내가 천오백원짜리 학교앞 식당밥을 먹을 때 오백원짜리 학교구내식당 밥도 못 먹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김열규가 지은 '한국인의 화'라는 책에 보면 화병에 대해 나온다. 국제의학회에 화병이라는 한국어로 등록까지 된 의학어라는데 한국인의 화병은 모두 같아지고 싶어하는 열망에서 나온다는 거다.

 

내 남자가 늘 내게 하는 말이 있다. 돈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걸 쓰고 싶으면 저걸 쓰지 말아야한다는 거다. 물론 그게 잘 안먹히니 이 남자는 거시적인 맥락에서 하나가 쓰면 하나라도 아껴야한다는 인생철학으로 살고 있다만..-_-

 

오늘 춘분이라 일본휴일이었다. 어제 글도 올렸지만 이래저래 복잡해서 술도 좀 마시고 사온 음식들이랑 불까지 피워가며 쇼를 하고 늦게 잠이 들었는데 휴일인지 몰랐던 나는 엄청 피곤한 상태에서 신랑이 부엌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깨서는 놀라 나갔더랬다. 

 

이 남자 오늘은 안 일어나도 되는 날이라는데 잠도 덜 깬데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나는 열심히 식사를 준비한 후 커피잔 들고 앉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이 남자가 회사를 안가는 거다..

 

이렇게 억울할데가..^^;;

 

어쨌든 보고싶었던 영화 향수는 거의 매진이었고 도쿄구경이나 하자며 그때 올렸던 칭칭덴샤를 타러 나갔는데 그 재미있는 라면집이 문을 닫아서 (오늘 알았는데 그 쿨한 라면집은 일요일과 휴일은 다 놀고 평소에도 11시에서 17시까지 밖에 안한다. 그렇게 쿨하게 음식점을 운영할 수 있다니..ㅎㅎ) 신주쿠까지 가서 초밥을 먹었다.

 

그리곤 어제 본 그 에도시대 시장 비슷한 걸 보여준다며 니혼바시 미츠코시 백화점까지 갔다. 거기서 그 유명하다는 스시매장에서 초밥을 본 신랑. 어제도 물론 김밥을 딱 하나 주면서 가격을 이야기했더랬다. 그리고 자기가 초밥을 좋아하니 그 집에 가서 한 번 먹어보잔 말도 했고 신랑은 알았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신주쿠에서 먹었던 초밥은 1600엔이었는데 그 매장의 그 비슷한 초밥가격은 5250엔.  우리가 평소가는 단골 회전초밥집에서 우리가 먹는 가격이 보통 술까지 만이천엔정도니까 사실 그 가격이 그리 끔찍한 건 아니다. 그래 초밥에 열광하는 신랑이 맛을 보고싶다면 (오죽하면 삼년내내 외식은 그 초밥집이겠냐) 당연히 난 살 생각이었는데 이 남자왈 내용에 비해 너무 비싸단다.

 

나야 점심에도 초밥을 먹었고 신랑이랑 여기서 하도 초밥을 먹어서 십년동안 초밥을 못 먹는다고 해도 서러울 게 없다만 진짜 초밥에 환장(!)하는 신랑이 그 유명하다는 집인데 그냥 돌아서는 걸 보고 느낀게 많았다.

 

중요한 건 어쨌든 분수에 맞는 소비생활을 하는 것. 허영이 아닌 곳에 제대로 투자하는 것 이게 돈이라는 게 가진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횡설수설 글이 길어졌다만 어쨌든 이런 저런 생각을 요즘 하고 있었던데다 오늘 계기도 되니 그냥 올린다.

 

문제라면 돈에 대해 삼십년 가까이 쿨한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예전처럼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거지만 말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고 싶은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돈에 관한 게 쉽지는 않다.

 

 

 

 

 

2007.03.21 Tokyo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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