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에서의 단상 91

영화 콘클라베 그리고 그 세대

누가 교황이 되고 뭐 그런 거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마침 영화도 나와있고 예고편도 근사해 결국 봤다너무 기대를 해서인가 영화는 그냥 그랬고 존재자체도 모르던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결말은 황당하기까지 했다유력한 교황후보였던 테데스코추기경사야가 아는 몇 안 되는 이태리단어 중 하나가 테데스코인데 독일인이라는 뜻이다그래 계속 테데스코만 들리고 한두 달 배운 실력으로 이태리여행하던 생각이 자꾸 나 집중이 더 힘들었다서양인들은 한국이름이 다 같다고 놀리는데 사야입장에서는 독일인추기경님 화관씨 등등 이름에 뜻이 들어가는 게 더 웃기다랄프 파인즈의 연기는 늘 그렇듯 좋았고 수녀역으로 잠깐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 이사벨라 로셀리니도 반가웠다어떤 영화인가에서도 봤었는데 신(?)의 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뭔가 ..

교황의 영화같은 마지막

교황께서 선종하셨단다지난번 잠깐 언급했지만 고령에는 폐렴이 워낙 치명적이라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봤다근데 그런 사야를 비웃듯 퇴원을 하셔서 의지도 대단하시지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어제 성바오로성당에서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신 뉴스를 봤는데 오늘 현지 아침시간에 돌아가셨다니 그냥 병원에서 돌아가셨다고 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귀를 의심할 만큼 놀랬다올해가 카톨릭 대희년이라는데 퇴원하셔서 그 중요한 부활절예배까지 참석하고 다음날 바로 떠나셨으니 뭔가 영화 같다는 생각에 교황다운 아름다운 마지막이었다 싶다이렇게 소설을 마무리하면 주인공을 미화하는 작위적 설정이라고 했을 거 같거든어제 (하필) 밴스도 만나셨는데 그걸 계기로 개과천선하고 그럴 일은 없겠지너무 뻔뻔하게 성경에서 자기 가족을 먼저 챙기라고 했다고 헛소리..

인간의 신비로움

재작년에 유튜브에서 다큐 '어른 김장하'를 봤다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부자가 되고 그 돈을 거의 사회에 환원했다는 분의 이야기사야에게 인상적이었던 건 박리다매무슨 공산품도 아니고 한약재를 그리 판매하는 게 엄청 수고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쉽게 돈 버는 방법을 거부한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아파도 약재 한번 써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었을까그러고도 부자가 되었다니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어마어마하단 얘기였겠지허준드라마에서도 갓 의원이 된 허준이 왜 그 약재를 처방했냐는 스승의 물음에 그게 싸고 구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눈빛이었다날카롭다고 해야 하나 서늘하다고 해야 하나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조용조용 이야기하는데도 그..

신문 호외를 보고

사야는 한동안 주제넘게도 민주주의보다 인간에게 더 적합한 제도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앉아있었다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민주주의라는 게 너무 너덜너덜하단 느낌이었다찾았을 리 만무고 이것저것 읽고 듣다 보니 사야가 찾고 있는 게 새로운 뭔가가 아닌 더 발전된 민주주의인 것 같더라지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어떤 완성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전받고 보완되고 변해가는 유기체랄까다수결의 원칙 같은 것도 보완이 필요하고 말이다다수라고 늘 옳은 건 아니지 않은가파면이 결정되고 이 호외가 나온 모양이다저 신문사기자는 막 자부심도 느끼고 기념으로 간직하겠다고들도 하는데 사야는 보는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시민이 이겼다니 그럼 탄핵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란 말인가아주 오만하고 비민주적인 표현이다거기다 파면으로 다시 민..

불행중 다행

사야만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너무 힘든 사 개월이었다절대 있어서는 안 될 말도 안 되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났는데 멀쩡한 인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는 게 사야는 믿기지가 않아 더 힘들었다거기다 헌법학자들까지 나와 서로 옳다고 떠들어댈 때는 무슨 말인지를 몰라 자괴감이 들었고 선고가 자꾸 늦어지니까 헌법도 무시되는 세상이 다시 올까 두려웠다오늘 판결문은 어려운 말도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배웠던 것들을 명쾌하게 짚어줘서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발음도 좋고 덤덤히 읽어 내려가시는데 구구절절 공감했다교과서에 실어서 대통령의 의무가 뭔지 법과 절차가 왜 중요한지 아이들에게 토론하게 하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저 간단하고 분명한 판결문을 듣고도 파면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신..

꼴보기 싫은 삼대장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뉴스화면으로 건 사진으로 건 그 꼴도 보기 싫은 삼대장이 있는데 현야당대표, 현축구국대감독, 그리고 미부통령이다( 트럼프나 머스크도 그 정도는 아니고 현대통도 꼴도 보기 싫지만 살짝 결이 다르다 ) 이 셋은 비열한 데다 말이 안 되는 말들을 그럴싸하게 늘어놓는 재주는 타의추종을 불허하고 되지도 않는 우월감은 하늘을 찌른다어쨌든 안 볼 수가 없어서 요즘 사야의 분노지수를 자꾸 높이는 건 밴스인데 남의 나라 대통령도 아니고 부통령이 이렇게까지 싫을 줄이야그 대단한 예일로스쿨을 나왔다는 이 남자는 우선 예의도 없고 무식하다아니 부통령씩이나 되어서 예멘 후티반군이 왜 배들을 공격하는지도 모르면 어쩌자는 거냐고하필 쓰는 말들도 사야가 못 알아먹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고급진 표..

야만의 시대 그리고 희망

트럼프와 밴스에게 모욕당하고 협박당하는 모습의 젤렌스키 대통령영어가 모국어도 아닌데 언어도 권력인데소리치고 흥분하는 두 사람 속 그의 모습이 아프게 눈에 들어오더라태어나서 그런 고뇌스런 표정과 눈빛을 처음 본다곤혹스러움 결의 절박함 분노 답답함 등등도저히 한마디로 정의가 안 되는 깊은 눈빛한 사람의 표정과 눈빛이 저리 복잡하고 많은 걸 담을 수 있다니야만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인 건가약육강식 피가 뚝뚝 흐르는 날것 그대로를 온 세계가 봐야 하는 세상이라니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지만 교황께서도 회복은 불가능해 보이고 UN 사무총장은 누군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고 유럽도 리더라고 할 만한 인물도 없는데 그런 처참한 광경을 볼 수밖에 없는 게 그냥 너무 슬프더라그런데 BBC 뉴스에 달린 수많은 댓..

피아식별이 어려운 세상

사야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피아식별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공산독재에 반대하는 자유민주진영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게 어쨌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믿고 살았다미국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더라도 그 자유민주주의의 보루 같은 거랄까 그래도 나름 믿음이 있었다해리스가 당연히 대통령이 될 거라고 믿은 건 아니었기에 트럼프가 이겼을 때도 크게 놀라진 않았고 또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 세상이 망한 건 아니었으니 걱정은 했을지언정 절망하진 않았다그런데 다시 대통령이 되자마자 보이는 모든 행보가 충격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다 안될 정도다우크라이나에게 전쟁을 왜 시작했냐는 그의 말을 틀렸다고 하는 건 무의미하다그는 힘도 없는 주제에 왜 저항은 했냐고 한심해하는 거니까멍청한 니가 주제도 모르고 싸우겠다는 바람에 우리 돈이 많..

흥미로운(?) 독일 정치인

독일선거가 끝났다이번 선거에서 가장 특징적인 건 극우정당 AfD의 승리다무려 20프로를 얻어서 현 집권당인 사민당보다 많다니 좀 충격이다그 당의 공동대표이자 이번 총리후보였던 알리스 바이델 사야보다 딱 12살이 어린 여성정치인몇 년 전 의회에서 발언하는 걸 처음 봤을 때 독일에 저렇게 말도 잘하고 단정한 여성 정치인이 있었나 싶게 인상적이었는데 극우정당 소속이었다편견 많은 사야에게 극우정당은 괴물 같은 네오나치들 어린 시절 뿔 달린 빨갱이들만큼이나 무서운 존재들이었기에 많이 놀랬다볼 때마다 저 흐트러짐 없는 머리스타일에 전 메아켈수상보다도 옷을 안 갈아입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 수상도 늘 비슷한 스타일의 옷만 입어서) 무채색 오피스룩이다 (저분은 치마도 입긴 한다만)늘씬한 미인에 발음도 좋고 볼수록..

어느 열성 엄마를 보고

한 엄마가 자기 아들 '구출'기라며 장문의 글을 페북에 올린 게 회자되길래 읽었다수렁에서 건진 내 아들 수준의 눈물 나는 분투기인데 흥미로운 포인트가 많다자신을 깨어있는, 진보적인, 비판이론을 공부한, 미국에서 제대로 교육을 아주 많이 받은 사람으로 소개하며 (대학교수던데 이건 글을 다 읽고 알았다) 이건 뭐 전지전능 수준의 자식교육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이보다 더 교육을 잘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고 썼더라(사야는 강아지를 키우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수도 없이 회의하게 되던데 )십몇 년을 그리 정성 들인 '내가 바라던 대로 훌륭하게' 자란 아들이 '순식간에' 극우유튜브에 빠졌다며 구출해 오는데 수개월이 걸렸다는 거다'나처럼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어떻게 이 사태를 막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