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흔적

좌충우돌 새 생활 시작기

史野 2003. 12. 3. 13:07

Camille Pissarro. Rye Fields at Pontoise. Côte des Mathurins.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드디어 동경에 다시 우리 집을 만들었다



구조도 많이 다르고 창밖으로 바다가 아닌 빌딩숲이 보이는게 새롭지만 그래도 짐들이 대충 자리를 잡으니 아 이제 동경에 우리집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다



이삿짐이 도착하고 나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157개나 되는 짐이 다 풀어헤쳐지니 정말 난장판이 따로 없더라.



그 짐을 혼자 정리하며 제발 이 곳에서 최소한 2년은 문제없이 살게 되기만을 빌었다.



이사를 하는 날을 빼고는 내내 비가 내렸구 비에 젖은 도시를 바라다보며 하루에 열시간 이상 육체노동을 했다.



같은 짐으로 훨 적은 곳에 구겨 넣으려다보니 어찌나 암담하던지..



천천히 하면 좋으련만 성격상 할 일을 미루면 마음이 불편한 관계로 일은 하면서도 괜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더라



짐은 짐대로 정리해야하고 또 식사준비며 시장보기며 매일 해야할 일은 여전하구..



필요한 걸 살려면 최소한 두 시간은 돌아다녀야하고 말이 안통하니 손짓 발 짓까지 정말 피곤 그 자체다



전압이 안맞아 음악도 없고 티비도 없고 전화기도 없고 컴도 연결이 안되는 상황에 거의 말한마디를 안하고 일만 하며 몇 일을 보냈더니 사는게 뭔가 하는 생각까지...





동경에 와서 가장 달라진게 있다면 남편이 너무나 바쁘고 힘들어한다는 거다



하루에 15시간 가량 나가있는데다가 7일간 연속일을 한다면 상상이 가는지..



파김치가 되어 그것도 온갖 스트레스까지 짊어지고 들어오다보니 우리가 막 이사를 했다는 사실도 까먹고 사는 거 같다.



돈이 떨어졌을 법해서 돈 필요하지 않냐니까 회사는 걸어가는데다가 점심은 사먹을 시간이 없어서 돈 쓸 일이 없단다



아니 그럼 7시에 아침먹고 나가 11시가 다 되도록 굶고 일을 한다는 건지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는 거냐고 화를 버럭 내버렸다



이럴땐 남편이 야망이 큰 사람이라 자기 욕심에 그렇게 일을 하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 일이 더 중요하냐 가정이 더 중요하냐 한번 쯤은 앙탈을 부려볼 수도 있으련만..



이렇게 힘들줄까지는 몰랐다지만 그래도 미리 예상했던 일이라 그는 동경행이 결정 되었을때 무지 우울해했었다



그런 그를 잘해낼거라고 위로하고 안의 일은 절대 신경안쓰게하고 내조 잘하겠다고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이해하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혼자 방방 뛴건 나니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랴



퇴근한 그에게 힘들었냐고 뭘 먹고 싶냐고 웃어보였더니 최소한 한 명은 나를 보고 웃어주니 참 좋다 이러는데 눈물이 핑돌았다



얼마나 힘들까 싶어 안스럽지만 요즘은 나도 할 일이 너무 많고 말안통하는 곳에서 내 코가 석자라 생각만큼 잘해준다는건 어찌나 힘이 드는지..



토요일 출근하는 남편이 모바일폰을 놓고 가길래 아버님 병세도 궁금하고 그래도 제일 만만한 어머님께 하소연도 할겸 전화를 했더니 울 시어머니 안봐도 비디오라고 어찌나 나를 걱정하시던지 결국 괜찮다고 이삿짐정리도 다 끝나고 좋은 점도 많다고 내 쪽에서 열나게 위로만 해드리다가 끊었다



이럴땐 정말 착한 시어머니가 전혀 도움이 안된다..ㅜㅜ



일요일에도 9시넘어 퇴근한 남자를 무조건 끌고서는 근처 독일술집으로 갔다



커다란 맥주를 시켜놓고 앉아 그의 얘기도 듣고 내 얘기도 하고..



결국 서로 맡은 바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하자 그리고 서로를 조금씩 더 배려하다보면 우린 이 난관을(?) 잘 이겨낼거야 뭐 이러고 집에 왔다



뭘 해주까 필요한거 없어 물을때마다 그는 늘 그런다



난 네 웃는 얼굴만 있으면 된다고..



차라리 호텔식 아침식사를 준비해달라거나 살을 한 10킬로정도 빼달라고 하지.매일 웃는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ㅜㅜ



그런데 어쩌랴 그나 나나 결국 우리의 행복을 위해 애쓰고 있는 걸..



저축된 행복같은 건 믿지 않는 나니까 그래 지금 행복해하고 좋은 생각만 하고 자꾸 웃자



그리고 씩씩한 걸음 걸이와 밝은 웃음을 우리 집에, 이 도시에 마구 뿌리며 다니자

















2003.12.03 東京에서...사야




피사로의 그림처럼 호밀밭은 아니지만 요즘 해가 나는 날 토쿄의 분위기랑 비슷한 그림이 아닐까 해서 올려봅니다.

사진은 저희 집 바로 옆에 있는 절을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겁니다. 카메라는 망가진데다가 비는 내려서 선명하지는 않지만 참 운치있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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