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에 나는 머리털나고 처음으로 아주 부담스런 저녁식사를 했다.
회사의 엄청 중요한 사람이 동경에 동부인하고 온다는 거다. 그래서 말하자면 비지니스디너에 지루해할 그 부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
단지 그 이유때문에 우리부부가 초대되었다나.-_-;;
남편은 일에 방해된다고 출장에 데려가는 것도 싫어하지만 혹 데려간다고 해도 어떻게든지 조용히 있을거지 저렇게 당당하지 않을테니 확실히 권력있는 사람들은 어디나 똑같은거 같다.
울 신랑 보스의 보스의 보스(에구 힘들다) 랑 같은 급이라니 한국말로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어쨋든 울 신랑은 죽었다 깨어나도 올라갈 수 없는 무진장 높은 사람임에는 분명하고 내 남자는 막상 그 직접관련된 인물은 아직 본 적도 없단다.
내 남자는 이 돈장사하는 회사에서 관리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돈버는 애들의 그 잘난척을 다 받아줘야하고 그들과 비교해(!) 턱도 없는 돈을 받아가며 죽어라 일한다.
아니 집안으로 따져도 돈버는 사람이 있으면 살림하는 사람도 있고 뭐 그런거지 정말 그 차이는 내가 봐도 분통터지게 불공평하다
걔네들은 어마어마한 연봉말고도 돈벌면 돈번다고 상상불허의 보너스를 챙겨가고 못 벌면 위로금으로 또 거액을 챙겨간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내 남자 아마 다시 태어나면 지금 직업을 안 택할 게 분명하다..
스트레스강도도 높은데다 가끔 열받아하면 당장 때려치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오는데 보통은 그냥 자기야 자기가 넘 힘들면 언제라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어떤 경우도 괜찮으니 내 걱정은 말라고 말하지만 속으론 눈물이 난다
내 남자는 너무 힘들어도 견딜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지 집에오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게 최고의 내조라고 생각하며 방실거리고 살고있지만 이런 생활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런지.
그래 그 중요한 사람이 오는데 그 잘난 애들은 다 어디갔냐고 마누라가 나밖에 없냐고 따졌더니 거기 오는 다른 두 사람은 동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고 다른 사람들은 지위가 맞지 않는다나
평소엔 돈못버는 파트라고 대우도 제대로 안해주면서 또 그런 자리에선 지위를 찾는다니 기가막힌다..
못간다고 하고 싶었는데 내 마누라는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아 자기는 어디가도 자랑스러운데 그거 밥한 번 못 먹겠냐고 그냥 맛있는 식사한다 생각하고 가자는데 감동해서 그냥 그러자고 했다..^^;; (실제로 난 그날 역시 내게 중요한 치과약속이 잡혀있었는데 결국 여행뒤로 미뤘다..ㅜㅜ)
내가 짜증을 낼까봐 아님 비싼 곳에서 맛있는 식사를 공짜로 하고 싶어 미리 선수를 치는 건지 어떤건지는 몰라도 일단 엄청 기분좋은 멘트아니냔 말이다..ㅎㅎ
원래는 낮에도 혹 내가 그 부인 안내하면 안되냐고 물어봤다니 어디 퍼스트레이디오냐?
누가 내 남자아니랄까봐 자기도 똑같이 얘기하고 내 마누라 바쁘다고 거절하며 식사초대에만 응했다는 거다..(투덜거리긴했어도 난 하라면 했을텐데 아 정말 이럴땐 이 남자 너무 확실하다..-_-;;)
어쨋든 그 얘기를 들은건 몇 주 되었지만 나도 정신이 없고 남편도 잘보여야한다고 전혀 부담을 주지 않으니 신경을 안쓰고 있었는데 막상 날짜가 되니 무지 걱정이 되는 거다.
요즘은 주로 청바지나 실용적 옷차림위주로 살다보니 옷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요란하지않으면서도 세련되어 보이는 옷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가 없다.
거기다 영어하며 밥을 먹어본지 근 일년은 되었으니 혹 그런 자리에서 버벅대면 어떻하나 불안해지는거다.
아무리 한국하고는 분위기가 다르다고해도 사람일은 모르는 거고 좋은 인상남겨 나쁠게 뭐가 있다고 좀 미리 신경을 쓸 걸 그제야 밀려드는 후회.
그래 막상 당일날 긴장을 푼다고 미리 맥주를 마신게 취기가 올라 약속이 한시간 뒤로 미뤄졌길 망정이지 아찔한 경험을 했다.. (여기에 대해선 나도 충분히 반성했으니 제발 다시 언급해 날 아프게 하지 말길 바란다.남편에게도 차마 말 못했다..흑흑)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인터내셔널인게 그 높은 사람은 네덜란드사람, 돈버는 쪽 아시아책임자는 영국인 싱가폴에서 온 한 사람은 인도인 그러니까 독일회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의 네 명중에 독일인은 울 신랑밖에 없었다.
모두 어차피 영어로 얘기해서 우리도 영어로 얘기를 했는데 네덜란드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부인이 독일인이란다.
내실력이란게 뭐 독일어나 영어나 거기서 거기인 불쌍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다.(아 정말 다시 한 번 그 중 하나는 제대로 해야겠다고 이를 악물며 의지를 불태우지만 가능할지..ㅜㅜ)
처음엔 내가 독일어를 못하는 줄 알고 어느 언어나 상관없다고 하던 그 부인도 독일어를 쓰기 시작해서 저 쪽은 영어를 쓰거나 말거나 우리는 그냥 독일어로 얘기했다..
거기다 그녀는 아이없는 삶의 예찬론자(?)라서 아이없는 인생이 얼마나 풍성할 수 있는지에대해 일장 연설을 들었다...ㅎㅎ
괜찮은 분인데다가 취미로 그림도 그리고 미술에 엄청 관심이 많아 뭐 무난히 얘기를 할 수 있었던것도 내겐 운이었다고 할까.
막상 내 걱정을 들은 남편도 그럼 괜찮은 옷을 사라고 했는데 시간도 없긴했지만 결국은 구입하지 않고 15년전에 시장에서 이만원주고 산 원피스를 입었다...^^
아마 그런자리에 그런 옷을 입고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거라고 이건 기네스북감이라며 그 쪽이야 어떻게 생각했건 말건 성공했다고, 돈굳었다며 우리부부는 무진장 즐거워했다는거 아닌가..ㅎㅎ
그 중 한 명은 내 생각에 우리가 따로 만났다면 엄청 잘난척을 했을텐데 더 높은 사람이 나타나서인지 어찌나 겸손하고 조용하던지 새삼 권력관계란 것이 재밌어 웃음이 났다.
헤어지면서 자기가 또 오게오면 전시회안내를 해주겠냐고 어쩌고 (낮에 거절한게 찔리긴했지만 쇼핑이나 할 사람인지 전시회를 갈 사람인지 미리 알았냐고...^^;;) 인사를 하는중 그 남편도 합세해 유창하게 독일어를 구사하는데 그 영국인 그냥 암말도 안하고 가만히 서있더라..ㅎㅎ
언어도 사실 권력인데 이 문제는 언제 다시 한 번 따로 쓸 생각이다.
기분좋게 이야기하고 맛있는 식사도 한 그 저녁이 내 딴엔 무난해 다행이라 생각하고 높은 사람들이야 뭐 나들이겸 지사순회 이런것도 가끔 하니까 그냥 그렇게 다녀가나보다했는데 다음 날 남편과 식사를 하며 얘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거다.
그 날 낮에는 돈버는 애들이 엄청 깨졌다는데 다음 날은 내 남자가 엄청 깨졌단다. 너는 뭐하는 애냐고 왜저렇게 맘대로 하는 걸 막지를 못했냐고 했다나.
아니 울 신랑이 밤새가며 보고서올리고 그랬던 것도 다 무시해놓고 (물론 자기가 그런건 아니지만) 힘없는 내 남자를 지원도 안해주며 갈구기만 하면 어쩐단말인가.
금요일에 안쓰러운 남편을 위로하며 이 얘기 저 얘기하는데 갑자기 왜 그 사람이 이렇게 아시아쪽을 쫙 돌며 갈구겠는가 하는데 생각이 미친거다.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파워가 있던 하나가 밀려나고 (이런 사람들은 밀려나도 울 신랑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챙겨서 나갈테지만..-_-;;) 이 사람이 이 쪽 파트일을 맡게 될것 같다는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이게 우리에게도 변수로 작용을 하긴 할텐데 그게 악수가 될지 아닐지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가 원하는 바가 남편이 생각했던 방향이기는 하지만 지원을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남편동경생활이 몇 배는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근데 안봐도 비디오지 그 높으신 분께서 어떻게 우리신랑까지 신경을 쓰겠냔말이다.
오늘도 남편은 홍콩지사에 일이 있어서 회사에서 직접 공항으로 간다고 짐싸들고 출근했는데 (또 출장이라니..ㅜㅜ 지난 주 거의 자고 있는데 늦게야 집에 온 남자가 자기가 너 쓰러질 얘기를 할려고 하는데 미리 누워있어서 다행이라더라..-_-;;) 이번 주 안에 동경에 중요한 결정도 내려져야한다고 하고 이 상황에서 과연 다음 주부터 사주나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지
내가 물론 먼저 얘기는 안하겠지만 어쨋든 혹 중간에 불려올 가능성에 대해선 미리 생각해놓고 덜 열받아해야하지 않을까
아님 그냥 알아서 휴가를 반은 반납하자고 해야하는 걸까.
그것도 아님 그냥 이참에 이 생활을 접고 맘편하게 살자고 해야하는건 아닐까.
말로는 맨날 바보온달이 평강공주를 만나서 온달장군이 되는 거라고 잘도 떠들면서 뭐가 가장 현명한 건지 판단이 안선다.
아 정말 내조하기 힘들다.
2005.08.15 東京에서 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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