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은 여기시간으로 토요일아침 9시반경에 돌아가셨고 우리는 독일에 일요일 밤에 도착을 했다. 그 후 일주일간은 문화차이며 여러가지로 너무나 힘들고 상처로 남은 아픈 시간이었다.
아버님은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 내내 이 곳에 계시다가 저 곳에서 운명을 하셨단다. 독일법상 집에서 돌아가셨어도 36시간 이상 모시고 있을 수가 없다는데 우리가 도착했을때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그래 그 시간에 가볼 수도 없고 황망한 마음에 아버님방에 갔는데 그 곳은 벌써 시누이아이가 차지하고 있어서 아이침대며 장난감이며 난리도 아닌거다. 아니 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시자마자 어찌나 섭섭하던지. 그렇게 엇가기 시작해서 시누이와는 내내 엇갈렸다.
장지문제며 장례절차도 복잡하고 우리는 일요일에 독일을 떠나야하는 관계로 어찌 어찌 서둘러 금요일에 장례식이 잡혔고 그때부터 바쁜 일정이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전부 황당한 시간이었지만 독일장례과정을 보고하자면 이렇다
우선 부고장을 내는 일
친지분들 친구분들께 보내고 같은 내용을 신문에 실었다. 난 여기서도 부고장에 시누이 남자친구이름이 왜 들어가야하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버님을 뵈러 갔다. 장례절차와 장지등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장례대행기관이라고 해야하나. 원하면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했다지만 미리 전화를 해서 예약을 해야하는 관계로 언제든지 와도 된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 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그 사이에 시어머님과 시누이랑 한 번, 그리고 둘만 다시 한 번 다녀온게 전부다
분위기는 어찌나 엄숙한지 소리내어 울어보지도 못했구 그저 차가와진 아버님 손을 쓰다듬는데 가슴만 답답하고 미칠 것 같은 기분. 아버님은 너무나 편안해 보이셨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깨어 웃으실 것 같아서 얼굴을 만져보고 손을 만져보는데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몇 가지 마음에 안드는 일들도 있었던데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 날 저녁 시누이와 시어머니 앞에서 통곡을 하고 울었다. 그랬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이해못하시는 우리 어머님. 니 아빠 생각이 나나보다 아니면 니가 그렇게 마틴때문에 슬퍼하다니 감동이란 표정을 지으시는데 상처받았다. 며느리는 그렇게 슬퍼하면 안되는 건가?
그리곤 묫자리를 고르는(?) 일정 . 보통은 그럴 기회도 없다는데 어떻게 자리가 몇 개 있었다나. 이 맨 앞이 나중에 합장을 하실 생각이라 어머님과 의견을 합해 고른 자리다.
보통 자리를 삼십년 빌린단다
새로 만든 곳과 오래된 곳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이 쪽이 분위기가 훨씬 좋은 오래된 묘지쪽이다.
아버님묘자리에서 입구쪽으로 바라본 모습.
이건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묘지앞은 이런 풍경인 곳. 시부모님과 산책도 하던 곳이었는데..
그리곤 교회장식할 꽃과 관장식 그리고 화환등을 주문하러 갔다. 거기다 무슨 옷을 입어야하는지 코트에 장갑까지사고.. 내게는 이런 모든 것들이 꼭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더라.
가장 견딜수 없었던 건 집안분위기. 도대체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아직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시누이는 자기애랑 하루종일 웃고 떠드느라 정신없고 어머님은 맞장구를 치고 계시니 한마디로 적응이 안되는거다
시누이나 시어머님이 슬프지 않다는 건 아니고 아무리 그 문화에서 슬픔은 각자의 몫이라고 해도 인간의 마음은 다 똑같을텐데 하는 낯섬. 결혼하고 나서 심삽년만에 처음으로 그들과 내가 얼마나 다른지 철저한 이방인이구나 하는 자각에 몸서리쳐지게 외로왔다.
너희는 너희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내 식대로 슬퍼해야겠다고 인상팍팍 구기고 다니다보니 이건 내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한마디로 웃기는 상황. 울 시어머니 너희랑 달라서 미안하다고 그냥 나를 놔두라고 했더니 다른게 아니라고 당신은 나중에 혼자 슬퍼하시겠다니.. 도대체 그렇담 돌아가셨다고 식구들은 왜 모인단 말이냐. 서로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려고 만나는 게 가장 큰 목적이 아닌가?
장례식 전날 멀리서 오시는 친지분들이 호텔을 잡고는 저녁에 집에 잠시 들리시기로 했다는데 아무것도 준비안했다는 우리 시어머니.
마틴떠나는 길에 집에까지 오시는 손님들께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니 기다렸다는 듯이 찬성하는 두 사람. 장봐다가 혼자 식사준비를 했다. 나름 내가 마틴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란 생각으로 정성스럽게..그 날도 파티분위기. 그 사이에서 나혼자 울다가 이건 뭐 내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나 다 위로해주는 바람에 또 민망에 황당.
제일 황당했던 건 또 우리 시누이. 애도 안재우고 내내 분위기 망쳐놓고는 나중에 날더러 모여서들 아빠이야기를 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나. 자긴 다른 분위기를 예상했다고..
얘 나도 독일올때 너희랑 다른 분위기를 예상했거든? 무슨 정말 애있는게 벼슬인지 시누이 이번에 개판치는데도 놀랬다. 애없는 사람의 설움이 이런거구나 싶어 진짜 입양이라도 해와야하나 싶을만큼 다른 사람 배려는 눈꼽만큼도 안한다.
아니 상중인데 유기농음식 좀 안멕이면 안되고 낮잠 좀 늦게 자면 안되는 건가? 애가 이쁘면 아빠가 돌아가신 생각도 안나는건가? 나는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마틴이 아직 땅속도 아니고 돌아가신지 몇 일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깔깔대고 웃고 내내 즐거울 수가 있는지 그리고 그걸 왜 남들도 똑같이 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중엔 시누이 웃음소리만 들어도 꼴보기 싫고 아이도 꼴보기 싫고 시어머니 심지어 나름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신랑까지 꼴보기 싫어지더라
목사님 모셔놓고 아버님일생이며 장례절차며 이야기하는 동안 애가 어찌나 소란스럽게 구는지 신랑이 좀 조용히하라고 그랬다고 화를 버럭내는 것도 모자라 애가 뭘 안다고 그러냐고 한참을 난리를 치는 바람에 목사님앞에서 우스운 꼴까지 보이고 말았다.
아버님이 계셨다면 모르지만 그럴때 우리어머님은 전혀 도움이 안된다. 내가 한마디 했었다간 진짜 싸움났을 뻔. 그러느라 중요한 이야기들을 빼먹어서 나중에 어머님은 또 엄청 속상해하시고..
어쨌든 장례식은 괜찮았다. 춥기는 했어도 비도 안왔고 그 속에서 혼자 미친년처럼 울어댈까봐 미리 겁먹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도 없었고..하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수도없이 악수를 하느라고 울고불고할 여력도 없었다
몸이 불편하신데도 당장 미국에서 오신 쌍둥이고모님이 제일 슬퍼하셔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달까. 교회가 꽉 차도록 많은 분들이 오셨고 나랑도 잘아는 은퇴하신 목사님이 장례식 많이 가봤지만 이렇게 분위기 좋은 곳 처음이라고 손을 꼭 잡아주시는데 참 고마왔다. 그 분은 몇 일 전에도 집에 오셨다가 여러가지가 마음에 안든다는 내게 어쩌면 한국적인 방법이 더 인간적일지도 모르겠다고 위로도 해주셨더랬는데..
장례식에도 사진을 찍어줬으면 하는 시누이를 무시하고 아예 카메라를 들고 가질 않았다. 아니 내가 아버님 장례식에도 사진을 찍고 있어야겠니? 물론 하도 나랑은 다르게 모든 과정이 웃기게 돌아가는 지라 사진을 찍어야 하는거냐고 마리아네에게 전날 물었지만 말이다
전반적인 장례식은 영화에서 보던 거랑 같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장지로 이동을 해서 하관식을 하고 꽃이나 흙을 참석자들이 놓고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옆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이동을 해서 커피등을 나누며 이야기를 하다 헤어진다. 누구하나 서럽게 울고 있는 사람은 없다.
장례식후 다시 찾은 아버님의 묘. 몰라서 올케언니가 묻는데도 그냥 갔는데 보통 화환을 한다기에 우리 식구들 이름으로도 했다.
형제자매들이며 많이 하긴 했어도 고맙게도 신랑회사에서 괜찮은 화환을 다섯 개나 보내서 다 덮을 수도 있고 참 좋았다. 울 시누이 또 신랑더러 누가보면 니가 죽었는줄 알겠다고 했다며 신랑은 웃던데 그렇게나 할 말 못할 말 가릴 줄 모르는 애였나 싶어 나는 기가막힌다. 그걸 아빠 장례식날 오빠에게 농담이라고 한걸까?
한달전에 독일에 갔을때도 시누이에게 엄청 실망하고 열을 받을대로 받고 왔었는데 이번엔 하나부터 열까지 정나미가 떨어져버렸다.
크리스마스에 시댁에 갈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플 지경. 돌아오는 길 신랑이랑 이런 저런 속상한 이야기를 하며 나도 이제 보통 한국여자들처럼 시댁가는게 싫어지는 여자가 되었다고 했다. 신랑은 싸우라는데 자기엄마랑 자기동생이 싸움이 되는 사람들이냐고 쓸쓸하게 웃고 말았다.
시누이야 신랑이 한마디만 해도 난리고 어머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당신이 자식을 잘못키웠나보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시기 때문에 뭔 말을 못한다. 앞으로는 더 약해지실테고 말이다.
참 사람이란게 그렇다. 좋을때는 몰라도 상황이 안좋을때는 본성이라는 게 드러나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 자주 만난건 아니었어도 내가 아는 시누이는 똑똑하고 얌전했는데 요즘은 뭐가 잘못된걸까. 내가 모르던 묵혀졌던 감정들이 드러나는 건가?
어머님이나 시누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너무 잘했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더 외롭다.
예전에 어떤 한국여자가 내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해서 내가 무지 속상해할때 위로해주시는 어머님옆에서 아버님이 그러셨다. 그건 그 사람 잘못이라기보다 네 잘못이라고.. 왜그렇게 믿게까지 잘해주었냐고..
내가 이렇게 속상한줄 알면 아버님은 이번엔 뭐라고 하실까. 당신이 시누이때문에 속상하신 이야기를 털어놓으시면서 시누이에겐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실 정도로 딸내미를 아끼던 분이니까 내가 그냥 조용히 시누이를 이해해주고 챙겨주길 바라실까. 아니면 아버님이 평소 그러셨듯이 이성적으로 대답해 주셨을까.
아버님도 돌아가셨으니 식구들이 더 화목해져야 맞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속상하고 답답하지만 나도 뭘 어떻게해야 좋은 건지 모르겠다.
신랑말처럼 난 가끔 마음이 여리고 무지 착해서 걱정인 애는 맞지만 그렇다고 미안하거나 고마와할 줄 모르고 당연해하는데 무조건 견딜만큼 바보같은 애는 다행히 아니다. 그래 은근히 그 요란스러운 채식주의자 시누이 남친 식사도 신경 써줬으면 하는 시어머님 바램도 무시했다
하도 속상하다보니 잘못 살았나보다란 생각이 든다. 마흔이 되어서도 이렇게 인간관계 앞에서 막막할 줄이야..그것도 15년 가까이 들락거리는 시댁일로 이렇게 막막할 줄 몰랐다.
일주일내내 실컷 울지도 못해서 숨을 못쉴듯 답답했던데다 마음에 멍만 잔뜩 들어선 돌아왔다. 신랑은 자기들의 문화를 존중해 달라는데 이번엔 시누이의 행동까지 겹쳐 그런거지 다들 슬프다는 것까지 인정 안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게는 독일에서의 첫 장례경험이고 그리고 내겐 소중한 분이셨고 왜 슬픈데 엉엉 울지 않는 건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아님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나름 통과의례인지 어제 오후 돌아온 후 신랑이랑 나랑 둘다 갑자기 아프다.
그런데 일주일이나 비우고 오늘 출근해야하는 신랑때문에 나는 아프지도 못하고 밤새 차며 스프며 끓여다 날랐다. 이 왠수같은 남자는 그 상황에서도 입에 안맞는다고 대추까지 넣고 정성스레 끓인 스프를 안먹어서는 그 새벽에 스프를 또 끓여댔다.
물론 첫 번째 스프야 내가 맛있게 먹었다만 두 번째 스프를 끓이다가 이러니 내 인생이 힘든 거란 생각에 피식 웃었다. 안 먹으면 그만이지 나도 아픈데 왜 또 스프는 끊이고 서있는거냔 말이다.
좀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아직 그렇게 늦은게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 나이 마흔.
이 해 2006년, 사십대의 첫 해,
얼마 남지도 않았지만 이 마흔을 살아내는게 참 어렵다..
2006.11.07 Tokyo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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