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공놈이 이태원 경리단길에 갔던 걸 카스로 올렸는 데 갑자기 뇌 어딘가에 숨어있던 어린시절의 데이타들이 마구 쏟아져나오면서 그 길이 어찌 변했는 지 넘 궁금해진다.
세살때 서울로 올라와 중1마칠때까지 살았으니 사실 그곳은 엄밀히는 사야의 고향이랄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 보통 이태원이라고 부르는 1동쪽에는 몇 번 갔었지만 지금 경리단길로 뜨는 이동쪽은 가본적이 없다.
사야의 최초의 기억과 일단 이사는 했어도 이년간 남산밑의 중학교를 다녔으니 어린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마지막 삼년은 엄마가 그 경리단길에서 가게도 하셨으므로 사야에겐 앞마당같은 길이었달까
지금은 인도가 있으려나 인도도 없던 그 넓다란 길을 따라 학교에 다니던 생각.
물론 그때야 기껏 포니차가 다니던 시절이니 차때문에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긴 뭐 이태원초등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도 비슷하겠지
친구네 과일가게, 오백원이면 살 수 있었던 보드랍기 그지없었던 우유식빵을 팔던 제과점과 지금보면 엄청 협소하겠지만 가을이면 열리던 그 길 중간 배추장터.
그때야 김장을 백포기씩 하고 그럴때니까 정말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던 배추들이 생각난다.
남산2호터널앞에 있던 양어장 겨울이면 군인아파트의 잔디밭을 얼려만들었던 스케이트장 그리고 하얏트호텔앞에 있던 조그마한 공원.
공원이라기보다는 그냥 자그마한 풀밭에 가까왔던 그 곳엔 중3때까지 참 많이도 가서 뒹굴었더랬는 데..ㅎㅎ
근데 문제는 저땐 행복했나하면 그건 또 아니네
울 엄마의 학대와 아동착취..ㅎㅎ
당시 버스는 경리단 앞쪽길에만 섰었는 데 사야는 남대문시장 방산시장에서 산 사야 몸만한 물건들을 들고 버스에서 내려 저 경리단길을 걸어다녔었다네
와 또 갑자기 생각나는 데 초등학교 이학년때였나 삼학년때였나 이백오십만원짜리 어음을 들고 혼자 미아리까지 가는 버스를 탄 적이 있다
그건 사야가 운반했던 장남감무게보다 훨 컸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야의 엄마는 사야를 엄청 믿었던 것 같다. 어찌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이백오십만원짜리 어음을 맡기노..ㅎㅎ
당시 이태원에서 으리으리한 집이 일억이었고 오백만원이면 집도 사는 시절이었다..^^;;
어쨌든 사야는 그때도 별로 행복하지 않았고 혼날걸 알면서도 맨날 늦게 들어가고 죽고싶다는 생각도 가끔 하던 시절이었는 데 그럼에도 갑자기 이런 격한 그리움같은 게 생기는 걸 보면 정말 나이가 든 걸까.
담양시절 초딩밴드에 가입했다가 세월호에 대해 마구 지껄이는 동창들을 보며 놀래 탈퇴했었는 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시간은 사야의 삶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거기다 거의 나가계시긴 했어도 사야에게는 아빠가 살아계셨던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것도 참 신기한 게 지난 번 정신과 샘이랑 상담하면서 사야에게 아빠가 미친 영향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는 걸 확인했는 데도 짧은 시간이어서일까 아빠도 일종의 그리움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처럼 개인사도 마찬가지일텐데 그래도 아빠가 그리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같은 거랄까
우짜든둥 지금은 핫플레이스라는 그 경리단길에서 사야는 자랐다고
그래도 거긴 남산이 있었고 미군부대도 가까와 미제물건을 빼돌리는 아줌마들도 많아 새로운 물건들도 많이 접했었고 양공주도 많았지만 대사관이며 부자들도 많이 살았던, 다른 곳 대비 뭔가 많이 일어나고 있었던 곳은 맞았던 것 같다.
교생시절 그 당시 학교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 데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그 선생님은 그 당시 이태원에서의 교직생활이 문화충격같은 거였따고 하셨으니까.
사야도 그땐 펜턴트가 유행이었던지라 목에 네개씩 하고 다니고 그랬더랬다..ㅎㅎ
징한 사야 아직도 안버리고 있다만 그땐 또 자기이름을 새겨 선물하는 목걸이가 유행이기도 했다.
물론 그 곳에서 자랐다고 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지금 사야라는 인간이 갖고 있는 가치관중의 많은 부분이 그때 형성되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다음지도나 간헐적인 자료만으로는 그 거리가 어찌 변했는 지 상상이 안간다
위차상 사야가 살았던 딱 그 자리도 카페나 음식점이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사십년 전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번은 그 곳에 가보고 싶다
행복했건 안했건 그 곳에 가면 당시에도 치열하게 살던 작은 사야를 보게되지 않을까
워낙 떠돌아서 역으로 고향의 의미는 없는 줄 알았는 데 오늘 그 경리단 길이 그립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사야엄마는 그때 왜그랬을까
아니 이 평생을 일관되게 자신이 오직 진리며 남을 괴롭히며 사는 사야엄마에게는 참 과한 질문이다
원망은 안하고 살고있다만 지금의 사야는 오로지 우리 안여사의 몫이다
막내딸이었는 데 조금만 사랑해주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는 착하고 똑똑하고 그랬었는 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야는 지금 살아있는 게 기적같은 데 거기에 감사하지 못하고 여전히 살고싶은 이 욕망을 어쩌누
살고싶다는 게 비난받을 이유는 아니니 그냥 그 욕망을 용서하기로 하자..ㅎㅎ
아 오해는 마라
사야는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일 수는 없었다
여러가지로 참 안타깝다만 사야는 사야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완벽한(?) 상태다
그래서 뭔가를 탓할 수도 없고 막 억울한데 억울할 수가 없어서 더 억울한데..^^
그냥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거..
상기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렇다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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