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늑한 모래실

그래도, 산다

史野 2013. 1. 14. 17:21

 

 

어제 아침 일어났더니 영 컨디션 꽝. 썻듯이 요즘은 밤뿐 아니라 아침도 별로다. 아니 거꾸로 밤엔 술도 마시고 약도 먹지만 아침엔 그냥 또 벌거벗겨진 자신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아 그렇다고 솜이불속에서의 그 따뜻함을 계속 즐기고 싶은, 뭐 그런 소소한 즐거움이 없는 건 아니니 걱정은 마라..ㅎㅎ

 

 

 

계속 눈이 쌓여있었던데다 맑은 날이 많아 늦잠을 자는 사야는 몰랐는데 소나무에 서리꽃이 피었더라.

세상에나 서리꽃이 얼마나 아름답던 지. 없어지기 전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뛰어나가 사진을 찍었다.

아 삶이 이리 괴로와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거구나,

아니 사야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안도했달까

 

 

 

 

 

사실 얼마전에 나뭇가지 하고 어쩌고 하는데 언뜻보니 옆집 차가 없는거다. 왠지 추위를 피해 서울로 도망가(?) 버린게 아닌가하는 직감.

씽씽이도 없는데 들어와 앉아 있다보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다.

아 더 늦기전에 서울로 올라가버릴까 고민을 하다가 갑자기 든 깨달음. 어차피 사야는 그 집을 등지고 앉아있고 일부러 보지 않는 한은 그 집에 사람이 있는 지 차가 있는 지 모른다. (물론 장작이 집안에 있을 때에 한한 이야기다만)

거창하게 현상학 어쩌고 뭐시긴 아니더라도 내가 보지 않는데 그 게 있는 건 지 없는 건 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는거다.

결론은 그래서 혼자 버텼다.

 

 

 

 

담양에서 올라오던 날도 옆집 차가 없다. 그 전날 서울가셔야한다는 말을 얼핏 들은듯해 친구놈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짐을 부린 후 친구놈마저 떠났다.

지난 번에 씽씽이 데리고 있을 때 세 집에 혼자 남는다고 그 난리를 쳤었던 적도 있었는 데 그저 담담히 대문을 잠궜다.

정말 너무나 우울한 날이라 친구놈차 타고 그냥 서울로 올라가버릴 까 고민도 했었는데 거기다 한밤중에 깨면 전화받아줄 남친과도 그러고 올라왔는데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아 이렇게 조금씩 면역이 되어가는 건가, 그럼 사야는 앞으로 정말 여기서 혼자 잘 버텨낼 수 있는 건가

사야에게도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이란 게 가능해지는 건가..

 

 

 

 

가난하지만 남루하지 않게. 참 마음에 드는 말이다

어제 깜박잊고 보일러 온도 올려놓는 걸 잊고 잔 덕에 아침에 일어났더니 침실온도도 아니고 거실온도가 겨우 12도더라는 거다.

보일러를 켜려다 어차피 해도 들고 조금있으면 나가서 일도 할텐데, 싶은게 망설여지더라는 것.

근데 또 그 순간 든 생각이 절약하는 것과 궁상을 떠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거였다.

결국은 궁상으로 결론을 내리고 보일러를 돌렸는데 그 중도라는 게 참 어렵다.

 

돈이란 것에대해 남들보다는 조금 자유로운 사야는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돈자체에 대한 말이다) 풍요와 사치의 경계를 지키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그 반대는  사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라는 걸 절감하고 있다.

 

 

 

또 세상에나 계단밑 책꽂이를 대충이나마 닦고 있는데 안쓰는 바느질함 뒤로 저렇게 말벌집이 있더라는 것. 부셔버릴려고 하는데 가만 들여다보니 흙같은 거더라.

저걸 물어다 저기다 저리 짓느라 얼마나 수고를 했을 까 숙연한 마음까지 들더라지

 

정말 자연에서 살다보면 모든 존재가 너무도 신기하고 동시에 안쓰럽고 그렇다. 생존본능, 그리고 종족보존본능.

그러고보니 종족보존의 목적이 아닌 이유로 섹스를 하는 건 인간이 유일하다고 그랬던가?

아 사야도 그냥 살기엔 좀 억울한데, 섹스파트너가 필요한데 얼마전 술취한 젊은 놈 하나가 껄떡거릴 때 그냥 받아줄 걸 그랬나..하하하

농담이 아니고 사야는 남자를 보고도 설레지 않게 될까봐 거창하게는 너무 도(?)를 닦아 남자에게 무심해질 까봐 겁난다.

물론 승호엄마가 '너는 육십살이 되어도 연애하고 있을테니 걱정말라'고 그러며 보증했다만..나쁜 지지바, 쓰는 김에 더 쓰지..ㅎㅎ 

 

 

 

 

새들은 여전히 열심히들 오고있다. 큰새들이 왔다가면 작은 새들이 오고 나름 저 세계에도 규칙(?)이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종, 저리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기도 하다. 아직은 작은 소리에도 놀라 포르르 날라가버리긴하지만 그래도 먹을 것을 주는 집이라는 안도감같은 것이 저 놈들에게 조금은 생긴걸까?

 

 

 

 

그 난리를 친 덕에 이번에 울 새깽이들 사진을 한장 밖에 못 찍었다. 지난 번보다 훨 꼬질꼬질하고 주눅도 들어있는 느낌이라 안그래도 마음이 아팠는데 밤새 데리고 자긴했어도 그리 놀래키고 황망히 떠나와 눈물이 마르질 않는다.

저 놈들이 내게 준게 얼만데 내가 저 놈들에게 배운 게 얼만데... 내 새끼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정말 사랑한다.

 

그래도, 사야는 저 놈들이 없는 이 집에서 스스로 대견할만큼 잘 버텨내고 있다.

그리고 버텨내는 게 아니라 살아내려고 나름 애쓰고 있다.

이젠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예전처럼 고통스럽진 않으니까,

원망스런 사람보다는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그리고 사야는 사야 스스로 가장 큰 재산이라고 생각하던 그 '자신감'을 아직은 잃진 않았으니까.

 

이 지리한 싸움에서 꼭 이겨낼거다.

사야가 좋아하는 겨울이 벌써 반이나 지난 게 아니라 아직도 반이나 남았으므로...^^

 

 

 

 

 

 

2013.01.14. 여주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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