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삶이 좋긴 하지만 백수에게도 남 모르는 고민이 있다.
자신을 컨트롤하는 게 졸음이 쏟아 지는 눈꺼풀은 천하장사도 들기 힘들다는 것처럼 맘대로 안되는 까닭이다.
아침이라고, 이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라고 좋아하다 보면 어느 새 저녁노을이 지고 희미해져 가는 사위처럼 스산해 지는 마음.
거대한 목표같은 게 없는 나야 빡세게 인생을 살고 픈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싶은 소망까지 버릴 순 없다.
아버님이 아프시단 소식을 듣고 독일로 떠나던 작년 9월 18일부터 육개월간을 아무리 상황이 안좋았다고는 해도 너무 개판치며 살았다.
거의 날마다 술을 마셨고 평소보다 훨씬 많은 담배를 피워댔으며 정리도 되지 않은 생각들을 여기 사랑방에 너무나 쏟아냈다.
붉은 포도주는 끊임없이 나를 유혹했고 대낮부터 앉아 술을 마시기도 여러 번.
당연히 계획했던 일들은 무산되기 일쑤였고 그럼 또 그러려니 하루가 갔다.
물론 내겐 목숨보다 중요한 정신건강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도 있었다.
아버님의 부재를, 그에 따른 시댁식구들에 대한 반감을, 엄마를, 그리고 불혹이라는 나이를 나는 어떻게든지 내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만 했으니까.
일은 목요일에 터졌다(?)
트레이닝이 끝나고 체중계에 올라갔는데 이건 아닌거다. 내가 아무리 한국에 다녀온후 몸무게가 늘어서 안 빠지고 있다고 해도 그래도 빨리 찐거니까 곧 빠지리라 맘편하게 있었는데 이건 내가 자기관리의 의미로 정해놓은 마지노선까지 저만큼 넘어가 버렸다는 충격적인 사실.
이삼킬로 더 나가는 문제가 아니라 이건 내가 정해놓은 나름 삶의 기준이다.
내가 프로필에 언급한 내 가장 큰 재산이란 '자신감'은, 다름아닌 아무리 케세라 세라 살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한다라는 '자신에 대한 신뢰'다.
그래 금요일부터 집중관리에 들어갔다. 우선 세 끼는 다 먹되 먹는 양을 반으로 줄이고(나 먹는 거 아시는 분들은 그 반이 뭘 의미하는지 상상이 가실거다..ㅎㅎ) 먹는 양이 반이니까 담배도 반으로 줄였다. 사실 삼일간 담배도 안 피울까 생각했지만 그것까지 못하겠더라.
뭐든지 전혀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다간 좌절감만 커지는 법.
그렇게 삼일간 빡세게 운동하고 저녁엔 또 가서 반신욕하고 술 안마시고 담배는 반만 피우고 고픈 배를 그 싫어하는 물로 채우고 인터넷에 수다도 안 떨고
무엇보다 이 정도도 컨트롤할 수 없다면 넌 스스로를 책임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삼일간 프로젝트 실행
결론은 해냈다는 거고 가끔 백수를 괴롭히는 자존감을 회복했다는 거다. 나같은 백수는 가끔씩 이렇게 자신을 시험에 들 게 할 필요가 있다.
첫 날 너무 힘들어서였는지 오랫만에 잠을 설쳤던 겁먹어서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많이 먹지는 않아도 배고픈 느낌을 못 참는(여행가서 우리 부부가 싸우는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을거다.) 나는 덜 먹어서 살을 뺀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에 그게 가장 힘들었다.
거기다 주말이라 신랑식사도 챙겨줘야하는데 말이다. 맥주까지 따라다 주면서 한모금 못 마신 건 또 어떻고.
주말인데 푹 쉬어야하는 신랑까지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뭘 하는 지 구체적으론 말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감탄하는 신랑.
안그래도 니가 동그래져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나 뭐라나.(자기야 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말 안해줘서 고맙다. 자기가 살 빼라고 했으면 청개구리인 나는 이게 뭐 어때서 하고 버텼을텐데.ㅎㅎ)
문제는 그렇게 속성으로 뺀 살은 금방 돌아온다고 마구 놀리더라는 것..^^;;
자기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 내가 백수로서 잘 살아낸다는 나름 확인과정이거든? 그리고 속성으로 뺀게 아니라 제 자리로 돌려놓은 거거든? ㅎㅎ
삼월 말까진 삼일간 처럼 빡세게는 아니더라도 나름 애프터서비스차원의 관리기간이지만 오늘은 단골초밥집에 가서 맛있는 것도 양껏 먹고 맥주도 마시고 벼르고 벼르던 향수 영화도 봐야겠다.
별거 아니지만 나름 생각하는 프로젝트도 이런 맘으로 진행을 해 볼 생각
어쨌든 새로운 주에 맞게 아타고에도 드디어 아직 수줍은 모습이긴 해도 사쿠라가 피기 시작했다.
내게 대한 신뢰도 회복했으니 도쿄에 봄이 왔고 내 인생에도 봄이다
누가 맘대로 그 나이에 봄이냐고? 내 맘이지라기 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살련다..^^
2007.03.26 Tokyo에서..사야
넵 아직 저런 수준이긴 하지만 사쿠라가 드디어 피었습니다. 오늘 아침 다섯시 좀 넘어 일어나 창밖을 보는 데 꽃이 느껴지더라구요..ㅎㅎ
내려가보니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많이 피었어도 아직 볼만한 건 아니지만 꽃소식을 알리고자 몇 장 찍어 올립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알게 해주신 모님께 감사드리고 이 노래가 필요할 듯한 모군께 들려드립니다.
(친구! 내용이야 용기가 없다지만 하기 나름일세. 차표를 사서 떠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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