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흔적

심리적 안정감

史野 2007. 3. 8. 12:23

나는 원래 집꾸미기를 무지 좋아하는 애다.

 

침대보야 어차피 자주 갈아야하니까 그렇게까진 못해도 계절에 맞게 탁자보며 쿠션시트며 바꿔갈고 심지어 그림들도 계절 분위기따라 바꿔걸고 화분들도 그런 종류로 사고..

 

요리할 때도 맛도 중요하지만 보기에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는 철칙을(?) 나름 지켜오기도 했다.

 

그런 내가 살림에 완전히 취미를 잃어버린 건 여기 도쿄와서다. 청소기도 전압이 안맞아서 얼마나 쓸까하는 생각으로 대충 하나 샀더니 청소도 마음껏 안되고 새로 사긴 아깝고 부엌은 창문도 없어서 요리할 맛도 안난다 거기다 전압문제로 못 쓰는 부엌기구들도 쌓여있다.

 

우선 여러 번 언급했지만 아파트문제. 상해와 홍콩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가 이사하면서 얼마나 살지 모르겠단 생각을 처음으로 한 곳인 이유도 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결혼하고 가장 오래사는 아파트가 될 이 곳.

 

우리 아파트가 작다고하면 재수없어하실 분들 많겠지만 상해에서는 이거 두 배 크기에 홍콩에서도 훨씬 넓은 아파트에 살았던데다 문제는 짐은 똑같으니까 이 아파트가 답답할 수 밖에 없다. 거기다 크키에 비해 구조가 잘못 빠진 관계로 실제보다 좁아보이기도 한다.(이럼 내 남자는 실제크기를 왜 따지냐고 그러니까 좁은 거 맞지, 그런다만..ㅎㅎ)

 

집정리하는데 기본은 수납공간인데 일단 수납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거실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육인용 식탁에 식탁의자는 또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 침대는 일인용 매트리스가 두 개 들어가고 테두리까지 있는 거대 침대인지라 홍콩에서 집구할 때는 심지어 우리 침대가 들어갈 경우 방문도 안 열릴 침실도 봤다..-_-

 

거기다 여기와선 매 년 책을 수백만원어치씩 사댔으니 집은 그동안 창고수준에 이르러서 침실창문에 마구 쌓았더니, 울 신랑 우리도 창밖 좀 보고 살면 안되겠냐고 하고 신랑이나 나나 가구에 부딪혀서 멍들기가 몇 차례

 

그렇다고 내가 기본 성격이 있는데 아무 노력도 안했겠냐 거실에 있던 계단식 장식장을 침실로 치우고 침대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심지어 거실에 있는 소파도 신랑 방에 있던 소파랑 바꾸기도 하고 작년엔 결국 내 PC를 버리고 내 책상까지 분해해서 15층 창고에 가져다 놓기에 이르렀다. (이런 걸 신랑없을 때 이 아줌마의 힘으로 혼자 다했다..-_-) 

 

그래도 별 나아지는 게 없어보이는데 절망해서는 모든 걸 놓고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하시는 분들이 해주시는 고양이세수 수준의 집에서 그냥 버티고 있었다.

 

작년에 신랑이 홍콩에서 보스가 왔다면서 집에 저녁초대를 하고 싶다는데 내가 놀라 기절하며 싫다고 그랬다. 음식이야 전혀 문제가 안되지만 이 집을 어떻게 보이겠냐고. 정말 사람들 불러다 파티하는 거 좋아하고 손님오는 거 좋아하던 내게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래저래 스트레스 이빠이였지만 그래 조금만 참자 이젠 곧 떠난다란 생각으로 버텼는데 이년을 연장하고 나니까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더라는 것.

 

그래 심각하게 이사를 고려했는데 그때 이야기했던 이 아파트의 월세. 그게 알고봤더니 이 아파트가 그 가격으로 올랐다는 게 아니라 신랑이 회사에서 그 만큼을 더 받아낼 수 있었다는 거였는데 오해도 인해(사실 그게 오해가 아니라 신랑의 고의가 아니었나 아직도 의심한다만..ㅎㅎ) 이사도 포기했다.

 

처음부터 회사일이 어떻게 진행될 지 몰라서 년으로 계약을 맺은게 아니라 이사 삼개월전에 이야기하는 걸로 했다는데 아버님 일로 독일왔다갔다 하느라 여러가지 복잡하기도 했고 말이다.

 

올렸듯이 집안을 좀 정리하고 화요일에 책까지 싹 가져다준 후 어제는 사람들이 사건해결을 하러 왔었다. 그래 어차피 번잡한 김에 그림을 걸자 생각하고 그때 그림도 걸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가 인테리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그림과 책과 조명인데 그림은 삼년이 넘도록 바닥에 세워져 있었고 조명은 전압문제도 있어 장식품으로 전락한게 몇 개인데다 이 곳이 밤에도 워낙 밝은 관계로 별 빛을 못 발한다. 거기다 책은 여기 저기 뒹굴었으니 내가 이 집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던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각설하고 어제 드디어 그림을 걸었다는 것. 이 아파트는 그림거는 것도 너무 복잡해서 우선 가구배치가 완전히 끝난 후에 걸자하고 바닥에 세워놓았던 게 어떻게 삼년이 흐른거다.

 

그 복잡함이 뭐 삼년 지났다고 달라졌겠는가 내가 걸고 싶은 곳에 맘대로 걸 수도 없었고 총 다섯 개 이상은 걸 수 없다는 그지같은 규칙이며 어느 나라를 떠돌아도 별 문제없었던 내 날씬한 거울을 걸 수 없다는 거며 머리에서는 쥐가 났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 타협을 보고 결국 했다.

 

기술자 네 명에 나를 위한 영어통역까지 다섯 명이 나타나서 두 시간여를 북적대다 떠났는데 내가 걸고 싶었던 그 장소들은 아니더라도 그림이 벽에 걸린 걸 보니 믿을 수 없으리만큼 마음이 안정이 되는 거다.

 

일들도 어찌나 꼼꼼하게 하던지 신랑방 문제도 너무도 흡족하게 해결이 되었고(퇴근해온 신랑이 감동했다..ㅎㅎ) 거실 침실 신랑방 복도 화장실에 하나씩 걸린 그림들을 왔다 갔다 바라보고 있으니 , 아 이거였나, 싶은 게 이제야 이 아파트가 내 집처럼 느껴졌다.

 

이 아파트에서 삼년하고도 삼개월을 살았는데 말이다.

 

더블린 첫 해 딱 일년만 살거라고 가구딸린 아파트로 들어가면서도 그림은 다 챙겨갔었는데 어찌 이렇게 살았나 싶은게 헛 웃음도 나더라.

 

일이 끝난 건 세 시 정도고 신랑은 회사사람들과 술을 마시기로 했다니 열시나 넘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평소같으면 나가서 포도주라도 한 병 사왔겠지만 어찌나 마음이 편하고 좋은지 그저 혼자 만족감에 취해서 술한모금을 안 마시고 음악듣고 책읽고 그랬다.

(아 물론 그녀가 블로그글을 읽고 적어놨다 챙겨다준 허만하의 '청마풍경'을 읽느라 그런 이유도 있다만..ㅎㅎ)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꾸 인정하게 되는 건 사람이 환경에 너무나 큰 영향을 받는 다는 것. 그림 몇 개 걸었다고 이렇게 마음이 안정 되고 행복하다니 내 스스로에게 내가 놀랬다.

 

부엌에 갑자기 창문이 생겼을리 만무지만 그리고 안타깝게도 갯수초과로 그림을 걸진 못했지만 쌓여있던 요리책을 싹 치우고 조리기구들도 좀 버렸더니 부엌도 나름 빛난다. 앞으론 요리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세어보니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이 한국어 독일어책 합해서 이백 권이 넘어가니 책도 당분간은 구입자제다. 독일가면 배송비 무서워서 책 못살까봐 열심히 모으고 있었던 건데 그땐 또 어떻게 되겠지 미리 염려하지 말자.

 

바꿔야할 거야 많지만 더이상 미루지 말고 우선 가장 중요한 거실 소파를 바꾸고 (소파 새로 사기로 결정했다니까 내 남자 넌 몇 달 전에도 그 결심을 했다더라..-_-;;) 손님오는 걸 겁나하지 않던 예전의 나 답게 살아야겠다.

 

어쨌든 사람도 있어야할 자리에 있어야 빛이 나는 것처럼 그림도 그렇다. 그림의 자리는 벽이지 바닥이 아니더라..ㅎㅎ

(삼년 넘게 만에 그림을 걸었다니 울 시어머니 내 트레이너 다 뒤로 넘어간다..^^;;)

 

 

 

 

 

2007.03.08 Tokyo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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