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나가서 드디어 책을 가져다주고 왔다.
뭐 일일히 세보진 않았지만 백권이 넘을 것 같은데 복도에 내어놓고 저걸 어떻게 가져다주나 걱정했던 거에 비해선 너무 무거워 땀을 바가지로 쏟긴 했어도 의외로 쉽게 가져다 드렸다.
그냥 걸어가다 발견한 레스토랑이라서 위치도 정확이 모르고 주소도 몰라 프론트에서 그 근처 절이름을 일본이름으로 알려달라고 하고 그 근처까지만 가면 내가 어떻게 찾겠다고 했는데 재밌는 건 이 택시기사분이 내가 전에 걸어갔던 그 길을 그대로 운전해 가시는 바람에 쉽게 찾았다..^^
여행가방 하나 가득 넣고 슈퍼에서 주는 종이봉투 세개였는데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어떻하나 걱정했더니 아래에서는 도어맨 아저씨가 거뜬히 차트렁크에 넣어주고(그걸 이 순진한 나는 같이 들어요 물었다는 것..-_-) 한국식당앞에서는 기사아저씨가 또 거뜬히 내려주셔서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서 독일로 이사올 때도 그랬고 매번 이사다닐 때도 그랬고 책을 정리한 건 한 두 번이 아니다. 거기다 오지랖넓은 나는 만나는 한국애들을 교육(?)시킨다는 의미로 빌려줬다 못 받은 책들도 많다. 그래도 내 지인들에게 갔거나 버리긴 했어도 이렇게 남들이 앞으로도 읽을 곳에 많은 책을 넘기고 오니 참 기분이 묘하다.
버릴 거였으니 누군가에 쓰임이 된다는 게 뿌듯하기도 하고(내가 책을 가져다 주겠다고 한 그 날 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몇 한국아주머님들이 날더러 그 말을 듣고는 복받으실거라더라..ㅎㅎ) 왠지 내 치부를 드러내듯 혹은 누군가 내 영역을 침범하는 듯한 불편한 마음도 숨길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 독서의 흔적을 훓겠구나 하는 마음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랄까 새 인생을 시작한 기분이랄까.
뭐 다들 아시겠지만 나는 책을 정말 좋아한다. 책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인터넷에서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내게 글읽기는 아직도 인쇄된 책에서가 제대로된 글 읽기다.
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의 소망이 그렇듯이 나도 언젠가 삼면이 책이고 한 면은 전면창인 그런 서재를 꿈꾼다. 실제로 이층을 뚫어만든 딱 그런 어느 독일인의 서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나야 그렇게 부자가 될 확율은 제로고 앞으로 그렇게 책을 모을 확율도 제로다. 시댁에 있는 책을 우리가 다 물려받는 다면 공간은 모를까 책으론 가능하긴 하겠다만..ㅎㅎ
이번에 책을 정리하며 느낀게 참 많은데 내가 정리한 책들은 거의 소설책과 에세이류. 아주 늙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때라면 모를까 다시 읽게 될 책들은 아니었다. 거기다 한국책이야 신랑도 읽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내가 그 책들에 집착했던 건 내가 이만큼 책을 많이 읽었고 책이 많다는 내 허영이었다는 것.
사실은 허영만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시다시피 나야 한국에 사는 것도 아니고 모두 힘들게 끌고 오거나 혹은 선물받았거나 또 혹은 비싼 배송비까지 물어가며 EMS로 받았던 책들이니까
그래도 그런 책들이 다 빠지고 난 내 책장을 지금 앉은 자리에서 바라보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지금 내 책장에는 내가 아직 읽지 않는 책들이 많고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혹은 앞으로 참고해야할 그런 책들이 대부분이다.
아직 백권정도는 더 빼내도 될 것 같긴하지만 그래도 나름 내 독서편력의 엑기스랄까
누가보더라도 아니 설명하지 않아도 이 여자의 관심사가 뭐구나 혹은 이 여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살고 있구나할 수 있는 책들말이다.
나는 사실 별 집착이 없는 인생이다. 내가 가장 큰 비중을 두는 인간관계마저도 오는 사람 막지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자란게 내 인생관이다.
내가 생각보다 쉽게 이 나라를 가자 저 나라를 가자 신랑이 이야기할때 그냥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심지어 내 남자마저도 누군가랑 사랑에 빠져 나를 떠나겠다면 나는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다.
오래동안 쓰던 일기장도 다 태워버렸고 십년 가까이 특이한 모양만 모아놓았던 그 아끼던 귀걸이들이 없어졌을때도 어디있는 지 알면서도 찾으러 가지 않았고 내가 입고 있는 옷 혹은 들고 있는 가방도 누가 달라고 하면 그냥 준다.
돈도 그렇다. 내 남자는 자기가 돈관리를 안하면 나는 우리의 모든 돈을 이 사람 저 사람 필요하다면 다 나눠줄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 안되고 집착한 것들이라면 책, 그리고 엄마
이번까지 합해서 여태 버린 책들만 사백권이 넘겠지만 이번처럼 한꺼번에 이백권이 넘는 책을 정리한 건 처음이어서일까 굉장히 홀가분해지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이 몸으로 훨훨 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엄마문제도 그렇고 이젠 잘하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마흔을 석달 남짓 남겨놓은 시간
마흔이 이렇게 무서운거라니. 자꾸 마흔이 되기 전에 뭔가 달라져야한다고 이렇게 우스운 모습으로 마흔이 되기엔 부끄럽지 않냐고 스스로를 채근하게 되니 말이다.
만으로 마흔이되면 독일어를 완벽하게 하겠다는 목표는 물건너 가버렸지만 그저 이젠 남에게보다 내게 더 관대해지고 자신을 그만 괴롭히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시간
여행가방때문에 택시를 기다리게 해놓고 얼굴도 잘 모르는 아주머님에게 내 책을 마구 부려놓고 허둥지둥 떠나 온 날
기분이 묘하고 어쩌고 해도 스스로가 마구 대견한 날.
이런 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언제 마시겠는가.
마침 또 도쿄는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내려앉았고 내 남자가 열광하는 레나드 코헨의 노래가 흐른다.
2007.03.06 Tokyo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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