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gstraten, Samuel (1627 – 1678), A Man in a Window
난 우리집 유일한 수입원인 남편연봉이 전부 얼마인지를 잘 모른다.
이건 부끄러운 얘기지만 예전엔 남편이 제발 자기 수입에 관심을 좀 가져달라고 빌었을 정도로 원래 관심이 별로 없다..ㅜㅜ(왜 수입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빌기까지 했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ㅎㅎ)
몇 년 전부터는우리 집 모든 경제사정이 결산된 네 장의 월 말 보고서를 남편으로부터 꼬박 꼬박 받기에 나아지긴 했지만 그 복잡한 체계를 다 이해하긴 어렵다.
그 용지는 늘 내게 미스테리인데 상해까지는 유로로 받았지만 홍콩부터는 정해진 환율로 현지돈으로 받기에 작년에 엄청 발생한 환차손, 남편의 유일한 사치인 컴퓨터의 감가상각비까지 계산되어 나온다..ㅎㅎ
남편의 월급은 독일에서 세금과 연금을 뗀 순수연봉을 기준으로 주재원 수당이 더해지고 거기에 또 우리가 부담해야할 월세를 미리 떼고나오는데다가 일본측에 낼 세금을 미리 합산해서 주기때문에 그거 계산할려면 안그래도 경제학적으로 전혀 발전하지 않은 내 머리 깨진다..^^
어쨋든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친 연봉을 12번으로 나눠서 주고 우리식 보너스는 없는데 일년에 한번 성과급조의 보너스가 나올 수도 안(!) 나올 수도 있다.
사실 일본에 있는 독일증권회사에 다니는 내 남자의 월급은 그 엄청난 증권회사의 이름과 달리 수당을 빼면 무지 작다. 그래서 남편은 자기는 이 나라사람들이 너무 비싸서 데려다 쓰는 외국인노동자라는 말을 가끔 자조적으로 하곤한다.(집값이며 수당이며 부대비용을 생각하면 이 말이 꼭 맞는건 아니다..ㅎㅎ)
올핸 그 보너스를 우리가 요구했던 것보다 더 주겠다는 거다.우리의 그때 그 기쁨 아마 아시는 분은 아실거다.
죽어라 일했던 내 남자가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여겨져서 더 기뻤는데 어쨋든 그게 내가 한국가기 바로전의 일이다.
이 철없는 마누라는 늘 돈은 생기면 쓰는 줄 아는지라 자기야 엄마는 뭐사주자 내 친구는 뭐사주자 혼자 신났었다..ㅎㅎ
그런데 나중에 통장에 들어온 보너스를 보니 세금을 뺀 반액..
작년 보너스가 세금떼고 나왔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던 우리..
엄청난 보너스를 줄줄이 받는 회사에서 내 남자가 받은 금액은 비교대상이 안되는 서열이었지만 우리에겐 큰 금액이었는데 그 반이라면..흑흑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미리 알았으면 모르겠지만 내 돈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을때의 그 실망감..
그 실망감이 더 커서 지인들에게 하소연을 하긴 했지만 그 세금에 속상했던건 아니다
난 독일세금에 불만없다. 그 세금이 어떻게 쓰여지는 지를 알기때문이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은 없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사는 큰 수입원이다.
내가 알던 한 한국인이 독일인에게 이혼을 당하고 딸 애와 살고 있었는데 영주권도 없던 그녀에게 지원되던 정부의 여러 정책은 참 놀라운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양육권소송에서 독일어도 잘 못하고 직업도 없던 그녀가 져 독일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으나 독일법원은 아무 힘없는 그녀의 손을 들어줬고 통장으로 꼬박 꼬박 생활비를 지원했다.
유별나게 똑똑한 남자를 좋아하던 그녀는 그럴려면 대학을 다녀야하지 않을까를,어떤 취미생활을 해야할까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세금은 왕창 뜯어가더라도 혼자가 되어도 걱정하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 자존심은 좀 상하더라도 실직자가 먹고 살 수 있는 사회 아파도 누구나 병원가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난 좋다.
물론 그 독일이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고 그 문제는 늘어만간다.
엄청난 양의 세금과 교회세 의료보험비에 털어넣고 남은 월급으로 음료수값을 아끼려 집에서 미리 물을 마시고 나가기도 하고, 독일은행을 10년이나 다녀도 아직도 차가 없기도 하고, 면세점에서 2만5천원짜리 위스키도 손이 떨려서 못살만큼 내가 아는 그들은 궁상맞다.
거기다 연금수혜자가 더 많은 그 나라의 젊은이들은 불안한 미래를 위해 개인연금까지 가입해가며 허리띠를 졸라맨다.
우리 눈으로 궁상맞을 지언정 유행이나 명품도 모르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골프가 아닌 배트민턴이나 배구를 하며 여가를 즐기는 그들은 밝고 건강하다.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에 학교를 짓는다면 그 위스키값의 몇 배인 돈을 선뜻 내놓는다.
내가 사회주의에 긍정적 생각을 갖기 시작한건 독일의 정책뿐 아니라 동독사람들과의 교류와 중국에서의 생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외치던대로 천국에 살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억압받거나 극도의 경직된 사고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교되지 않았던 당시로 인해 사람들은 나보다도 피해의식이 없었다.
그냥 강제적으로 떼어가니 내는 것이지 자발적으로라면 난 절대 그 많은 세금분량을 선뜻 내놓진 못할 것이다.
네 가진 모든 걸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를 생각도 물론 없다.
그러나 가난은 나랏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옛 말이 있지만 국민이 낸 세금으로 그 나랏님이 가난을 구제하더라 이거다.
그래서 난 국가가 강력한 세금을 있는 자들에게 매겨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는 그 제도가 고맙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단 한번도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던 내가 사회주의자어쩌고 한다는 건 사실 좀 웃긴얘기다.
요즘은 그 당시 투쟁경력없고 무용담하나 가지고 있지않는 사람은 얼굴도 내밀기 힘들게 너도 나도 경력을 들먹거리고 있지만 난 유감스럽게도(?) 아니었다.
잘라말해서 난 학습된자가 아니다.
생활고때문에 사람들이 자살하고 생계형 범죄가 늘어나고 학습된자들이 국회로 대량 진출했어도 별 희망이 없는 지금 난 독일같은 체재를 꿈꾼다.
그리고 이제서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나누는 세상을, 그들이 낡았다고 외치며 버린 그 사회주의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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