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Old Man in Sorrow. May 1890. Oil on canvas.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떠돌며 사는 내가 만났던 나라사람들은 셀 수도 없고 그 중 함께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눈 나라사람들만해도 엄청나다 물론 그 중엔 한국인과 처음으로 술을 마셨던 사람도 많다.
다국가 사람들이 만나면 하는 얘기는 뻔하다 각 나라의 상황이나 역사 , 그리고 어떤 연유에서 자기 나라를 떠나 특별히 그 땅에 오지 않았으면 안되었는가 그런 얘기들.
그리고 그 외국에서 어떤 나라사람으로서 어떤 느낌을 갖는가가 주메뉴이다
그 순간 이슈가 되고 있는 각 나라의 문제들에대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고.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언어로 접했던 그들과의 만남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인가
물론 나는 한국사람이고 그들은 나를 통해서 한국이라는 나라, 한민족을 본다
누구를 만나건 내가 먼저 하는 말은 나는 한국인이다
그럼 나를 한국인이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어가 모국어이며 한국여권을 소지한 대한민국국민이라는 게 가장 우선일거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한 걸까?
내가 위에 열거한 요소들이 과연 그들과의 대화에서 나를 진정한 한국인답게 할까?
더이상 한국어를 일상언어로 사용하지 않고 한국의 상황에 대해 이렇다할 논리를 내세울만큼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선거권을 행사하지도 않고 지금 한국사회를 특정짓는다는,어떤 글을 읽어도 보통은 인용이 되는 드라마를 공유하지 않는데도?
모래시계나 야인시대 다모나 시청률 50프로가 넘는다는 대장금을 보지 않고서도, 다모폐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아니 이해를 할 수 없는 나란 사람도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한국여권을 소유한걸로 보자면 나나 박노자나 이한우나 다 한국인이다
그런데 우린 정말 같은 한국인일까?
그럼 그들이 공유하지 못한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쓴다는 건 또 어떤 차별점을 남기는가?
세계 어느나라를 떠돌아도 자의건 타의건 한인 사회에 속하지 않는 나는 남편과 거실에 앉아 붉은 셔츠를 입고 한국축구팀을 응원하더라도 그건 내 개인적 의미일뿐이지 다른 한국인들이 붉은 티를 입고 동질감과 정체성을 느끼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그 현장에 있어보지도 못했고 그 현장을 내 모국어로 전하는 감정섞인 멘트를 들어보지도 못했으며 골을 수 십번도 더 보내주는 방송은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다
나는 한국의 문제보다 팔레스타인문제를, 한국의 원조교제보다 아프리카의 슈가대디 현상을 더 쉽게 자주 접하고 산다
내게 이제 대구참사는(내가 다른 나라보다 한국의 구조적인 문제를 더 알고 있기에 사고자체에 더 분노하긴 하더라도) 독일의 대형기차사고나 아프카니스탄의 폭격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늘 피로얼룩진 뉴스시간속의 모두 허망한 죽음이요 더도 덜도 아닌 안타까운 생명이다
한국언론에게서의 해방 아니 소외라고 할까?
한국뉴스를 인터넷을 통해 한글로 접한다고 해도 영상매체가 주는 충격적 감정전이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인터넷이라는 이 공간을 통해 수도 없이 한국어를 쏟아내고 있는게 물론 큰 이유이겠지만 내가 늘 그리워하는 대상은 상대의 말에 들어있는 내용이지 그 내용을 담는 형식 즉 한국어가 아니다.
나는 더이상 고이즈미가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해서 분노하지 않는다
그의 말로 독도가 그들의 땅이 되지 않는 것을 내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의 발언보다 전쟁은 싫지만 국가의 이득이 되므로 파병에 찬성한다는 신문에 나뒹구는 그 막연한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앙케이트조사가.. 절대다수찬성이라는 국회이라크파병동의안이 나를 더 분노하게 한다.
그래도 나를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난 분노할 자격이 있는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를 만나건 자랑스럽게 나는 한국인라고 외치는 그 자부심의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는데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는 강조를 의미한다. 보통은 사람들도 아시아인중 인도 동남아 동북아는 구별할 수 있으니까.
그럼 난 중국인에 대핸 경제적으로 나은 나라라는 일본인들을 향핸 도덕적으로 낫다는 내 스스로의 편견을 강조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인간복제에 근본적으로는 반대하면서도 그걸 성공한게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조금의 비판도 허용하고 싶지 않은 이 심리는 무엇인가?
새로 발간된 은희경의 소설보다 그라스의 신작을 손에 넣기가 더 쉬운 내가 ,중요한 세계적 이슈가 생길때 한국언론보다 독일언론의 정보에 더 의존하는 내가..
그나마 희미해져가는 과거의 기억과 내 조국에 대한 막연히 감상적인 애정이, 나를 규정하는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내가 더이상 나를 만나는, 한국인을 처음 접할 수도 있는 그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을 대표해도 되는 걸까..
나는 오늘도 나의 정체성을, 내가 이 시대에 진정한 한국인인지를 묻고 또 묻는다.
2004.02.15. 東京에서...사야
'간이역에서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을 다녀와서 (0) | 2004.03.20 |
---|---|
사모바르와 칸트의 고향 (0) | 2004.02.23 |
나는 분노한다 (0) | 2003.11.05 |
몇가지 언어를 한다는 것에 대해.. (0) | 2003.10.21 |
강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0) | 2003.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