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보낼 수 없는 편지 3

史野 2013. 7. 24. 11:00

또 빗소리에 잠에서 깼어

바닥을 따뜻하게 만들고 이불을 둘둘말아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채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는 데 참 좋더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깨어나 빗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걸 당신이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래 내 인생에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렇게 누워 이 기적같은 날들에 감사하다가 당신 생각을 했어

아니 어제도 새벽에 깨어 잠들지 못하다가 누군가 뒤셀도르프로 검색해 들어온 흔적들을 따라다녔지

참 오랫만에 당신사진들을 봤다. 정답기도 낯설기도 한 묘한 기분이었어.

 

오늘은 당신의 생일.

정확히 육년 전 오늘, 난 제발 나를 놔달라고 미친듯이 울었더랬지.

그리곤 한달도 안되어 결국 당신을 떠나왔으니 그게 당신과 함께한 마지막 생일이었네.

 

당신은 십육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에서 생일을 맞겠구나

정말 오랫만에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할 지도 모르겠네.

 

당신의 생일선물이 되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던 게 벌써 이십년 전

당신은 이제 마흔 여덟,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의 남성이구나.

당신이 멋있게 나이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았었는데 당신은 여전하겠지.

 

오늘은 정말 많이 당신이 보고싶다.

여전히 술에 취해 잠들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의 나를 보면 당신은 많이 대견해 할텐데..

아무리 술에 취해도 아무리 많은 양의 약을 털어넣어도 잠 못 이루던 날이 많았으니까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여전히 터널같은 시간을 견뎌내긴 하지만 난 잘 지내

나를 옭죄던 많은 것들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와지고 있는 중이야.

 

그걸 당신옆이 아닌 당신을 떠나와 이루고 있다는 게 많이 미안하지만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분명이 이유가 있을거라는,    

넌 누구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는 당신의 그 무한신뢰.

그게 여전히 나를 지탱하는 데 많은 힘이 된다는 걸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올해가 뱀의 해니까 십이년 후에 당신은 환갑이겠구나.

그때 쯤이면 나도 조금은 근사한 인간이 되어있을까

이제 육년, 삼분의 일의 시간이 흘렀는 데 앞으로 그 두배의 시간을 더 견뎌내면

당신이 109번뇌라고 놀리던 그 인고의 시간속, 그 수 많은 번뇌에서 온전히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   

 

이 땅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래서 간절히 당신과 마주앉아 몇 시간이고 이야길 하고 싶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난 이 땅으로 돌아온 걸 후회하진 않아.

당신이 이 말을 듣는다면 조금 섭섭해 할까.

 

아니 당신도 알잖아 내가 당신의 아내였다는 걸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지

당신을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는 지.

그리고 당신은 내가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제일 잘 이해해준 사람이잖아

네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 지를 알기에 널 보내준다던 당신의 말은 결코 잊지 못할거야.

 

진심으로 당신의 생일을 축하한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 지 잘 알면서도 어느 도움도 줄 수는 없지만

세상 누구보다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응원하고 있어.

당신 마음아프지 않도록 더 노력하며 잘살께

 

자꾸 눈물이 나서 편지가 길어졌네

나름은 경계하는데도 중언부언 말이 많아지는 걸 보며 나이들어가는 걸 느껴.

이젠 당신에게 보낼 수 있는, 짧은 편지를 써야겠다.

 

Ich denke auch viel an Dich und hab Dich immer noch lieb.

그래도 이 말은 쓸 수 없을테니 그냥 여기다 쓸게...

 

 

 

 

 

2013. 07. 24. 여주에서.....당신의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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