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노란대문집

無心

史野 2008. 6. 24. 22:59

백프로는 아니더라도 요즘 내가 그렇다.

 

이 곳에 내려온 지 벌써 8일째, 어떻게 시간이 가는 지 모르겠다.

 

 

친구놈이 간 후 미친듯이(?) 풀을 뽑았다. 다행히 비온 뒤라 땅이 물렁해서 전보단 쉬었지만 그래도 뒷 마당까지 다 뽑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둘이 달라붙어 간신히 마치고 나니 이젠 좀 이 집에 사람이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

 

 

벼르던 꽃밭만들기를 하기 위해 드디어 담양의 5일장에 갔다. 신기한 것이 어찌나 많던지 꽃씨도 사고 모종도 사고 떡도 반찬도 거기다 만원짜리 쓰레빠까지 샀다.

 

여기선 비싼 신발이 하나도 소용없고 불편할 뿐 아니라 비싼 가치를 하지도 못하는데 서울에서라면 감히 신을 생각도 못했을 신발을 사고 어찌나 뿌듯하던지 좋아 팔짝팔짝 뛰었다면 과장일지언정 거짓말은 아니다.

 

 

맨날 일만 하는 산골아줌마가 장에 간다고 나름 때빼고 광내고 나섰건만 여행을 다니는 거랑 달라서인가 아님 내 기분이 달라서인가 그냥 촌아줌마일뿐..ㅎㅎ

 

삼천원하는 비빔국수를 먹고 캡 눈치보며 담배피고 그랬다지.

 

 

한 드러운 성질하는 나는 남친을 들들 볶아 당장 꽃을 심었다. 엄청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새발의 피다. 어쨌든 저 안엔 내 사랑스런 고구마와 서울에서 화분에 키우던 몇 식물들도 자유를 찾았다.

 

서울에서 새끼손가락만하게 열리는 고구마를 보고 참 고맙고도 미안했었는데 여기선 수확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뭘 좀 차분히 못하는 성격이기에 남친이 그만하라고 말리는데도 정신없이 저 땅을 파헤지고 어쩌고 해서 대충 저런 모양의 꽃밭형태를 만들었다.  

 

나중에 그의 어머님이 오셔서 보시곤 엄청 갈아놨다고 놀라시던데 저게 돌투성이인데다 잡초뿌리가 장난이 아니다. 태어나서 이런 힘든 일은 처음해본다 싶을만큼 한마디로 꽃밭을 만들기엔 개판인(!) 장소

 

결국 낫과 호미를 번갈아 써가며 저길 대충 구십프로 이상 뿌리를 걷어냈다. 이젠 다음 장에 가서 꽃만 더 사다심으면 괜찮은 꽃밭이 만들어질 듯하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손목이 시큰거려도 제목처럼 정말 아무 생각이 안들더라. 남친이 제발 쉬면서 책이나 읽으라고 말려도 어머님이 병난다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셔도 호미를 놓지 못하겠더라는 거다.

 

 

방울토마토도 사다심고 저 상자엔 과꽃 꽃씨도 뿌렸다.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싹이 돋기 시작해 바라만 봐도 흐믓하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나는 또 너무나 자연스럽게 식사를 준비한다. 우리 너무 잘해먹고 사는 거 아니냔 말까지 덧붙여가며..^^

 

 

고기공놈이 처음에 와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여기서 살기엔 좀.., 하던 그 집은 아직 두 달도 안되었건만 이렇게 차츰 사람사는 냄새를 풍겨가고 있다.

 

 

저위 화분들은 어머님이 키우시던 걸 받아온 건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선인장에 이렇게 너무나 이쁘게 꽃이 피었다.

 

 

어제는 목포에 일이 있으셨다며 하모니님이 다녀가셨다. 같은 전남이라도 목포에서 여기까진 차로 두 시간거리인데 그 밤길을 운전해 오시다니 어찌나 감사하던지..

 

그 밤중에 크게는 아니더라도 음악틀어놓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산중의 시간을 보내는 중. 내 요즘 취미중 하나가 일 다 끝내놓고 저기서 술한잔 하며 가끔씩 보이는 반딧불을 감상하는 건데 유감스럽게도 어젠 나타나지 않았다지.

 

사진을 올리지 말라고 굳이 부탁까지 하셨지만 또 주인장 맘이라고 말도 해놨던 관계로 그냥 올렸다 다시 뺀다..ㅎㅎ

 

커피마시고 느긋하게 아침먹고 백양사까지 걸어가서 어머님께 상추도 얻고 평소엔 차로 다니는데 하모니님덕에 오늘 처음으로 쓰레빠끌고 거기까지 어슬렁 어슬렁 가봤다지.

 

 

그렇게 또 다시 밤이 찾아왔다.

 

어제 일도 너무 한데다 과음도 했고 이래저래 쉰다고 한 일이 몇 시간동안 앉아 땅콩을 한가득 깐 것. 저녁할 기운도 없었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또 찾아오셔서 어쩌 먹고 어쩌고 하다 보니 또 밤이다.

 

그래 여긴 티비도 없고 이렇게 인터넷에 앉아있는 시간도 거의 없는데 세끼 밥해먹고 이 일 저 일 하다보면 시간은 참 쏜살같이도 간다.

 

그럼 또 잘 자고 일어나면 또 할 일은 태산이고...

 

그가 키우는 꿀벌들처럼 나는 요즘 이리로 저리로 분주하게 다니며 21세기가 아닌 17세기에 살았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이게 본채 법당(?)의 모습이다.

 

지금이야 정신이 없긴 하지만 빠른 시일안에 저 앞에서 백팔배를 시작해 볼 생각이다.

 

아직 이 곳에 정착해 살 자신같은 건 없다만 어쩌면 내가 애타게 찾아 헤매던 삶의 의미가 이 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이다.

 

남자친구는 함께 있을 수록 느끼는 건데 참 특별한 사람이다. 욱하는 성질도 있고 때론 황당하게 고집스럽기도 하지만 본인이 쉽지 않은 삶을 살아서인지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폭이 내 상상을 초월할 때가 많다.

 

자주 고맙고 자주 미안하고 그렇다.

 

내일이면 또 이런 저런 생각할 틈도 없겠지만

 

어쨌든 지금 드는 생각.

 

나를 이 곳으로 이끌어온 건 무엇일까.

 

예전이라면 나는 이럴땐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다..라고 썼겠지만

 

이제 나는

 

벌써 이렇게 늦었네 그만 자야겠다, 란 생각을 한다...

 

 

 

 

2008.06.24. 장성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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