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사람사는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
그렇다고 뭐 즐겁기만 한 건 결코 아니지요. 퍼질러 앉아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가 겪어내야할 과정이겠지요
그제 올케언니랑 점심을 먹으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14년동안 신랑을 너무 길들였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너는 책임이 있다'란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책임을 지기위해선 내가 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한다.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남에 대한 책임을 운운할 수 있냐구요.
그래서 지금은 왠만하면 제가 두고온 많은 것들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신랑의 멜을 받거나 전화통화라도 하면 가슴은 아립니다만 저는 우선 제가 행복해져야겠습니다.
제가 누리고 살지 못한 것들을 누리고 사는 요즘은 행복합니다.
그녀에게 전화가 옵니다. 새 물건 들어온 것들이 너무 궁금하다고 자기 언제오면 좋겠냐고요. 당장 내일이라도 오라고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9월 4일
아침에 일어나 우선 커피를 마시고 나가서 달리기를 합니다. 땀에 푹 절은 몸으로 편의점에 들려 물건들을 사서 올라옵니다.
또 간단히 복근운동등을 마치고 식사를 하고 설겆이와 청소까지 마친 후 샤워를 하고는 몽님께 점심을 얻어먹으러 갑니다. 복작거리는 동네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는 청계천을 따라 걷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집으로 갈 수 있다니 이런 복이 있습니까..ㅎㅎ
물론 대낮에 청계천에 앉아있거나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은 아닌것 같아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요.
집에 거의 다 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홈플러스에 들려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습니다. 차가 없으니 어찌나 무겁던지요. 마침 교대를 하는 택시를 탄 관계로 길 건너편에 세워주셔서 그걸 낑낑대고 들고오다가 온 몸이 땀에 젖었는데도 저는 노래를 부르며 걷습니다.
그리곤 생각합니다. 아 나는 타고났구나...
짐정리를 해넣자마자 일찍 퇴근한 그녀가 맥주캔을 가득들고 나타나고 간단히 저녁준비를 해서 먹고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떱니다. 오랫만에 이런 식사를 해본다는 그녀는 자기가 밥을 해줘야하는데 민망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사는 사람과 주부생활 14년인 사람이 어찌 같겠습니까? ㅎㅎ
분위기 좋은데 또 전화벨이 울립니다. 이번엔 오빠입니다. 올케언니랑 청계천을 산책중인데 잠시 들려도 되겠�니다. 맥주를 사들고 오는 조건을 답니다..^^
오빠와는 여덟살 차이인데(언니도 동갑입니다) 그녀와는 여섯살 차이니까 그 셋이 동년배입니다. 넷이 함께 술을 마시는데 너무나 즐겁습니다. 어찌나 웃었는지요. 이 왕 닭살인 부부는 혼자사는 여자 둘을 앉혀놓고는 염장을 열심히도 지릅니다.
저는 이거 우리집이 사랑방이라고 예전 프랑스의 살롱화하는 거라고 웃습니다.
달리기를 이틀했다니까 꼭 내일까지는 채우라고 놀리며 오빠네 부부가 먼저 일어서고 그녀와 한참 더 수다를 떨다 그녀 역시 지하철이 끊기기전에 일어섭니다. 제가 한국에 오면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일어선 적은 없지요.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전화를 합니다. 밤중에 제 전화를 받으니 정말 제가 한국에 있다는 게 실감난다고 상대는 말합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정말 좋다는 인간들이 많은 것도 행복합니다.
친구가 와있는데 저희 집이라고 전화했더니 다 늦은 저녁 친구남편이 아들내미를 데리고 출현합니다.
남들은 다 누리고 살았지만 저는 누리고 살아본 적이 없는 이런 것들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친구놈이 음악회초대권을 가져왔는데 그 친구가 자기 거기서 연주한답니다.
네 제 주변에선 늘 이런 우연들이 마구 생깁니다..ㅎㅎ
올해 들어서 몸무게가 총 사킬로나 늘었는데도 와서부터 이주동안 다들 절더러 아가씨랍니다. 새출발하는 마당에 그것도 아주 기분좋습니다..^^
청계천에서 아침마다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상류쪽은 답답하지만 제가 사는 하류쪽은 분위기가 훨씬 좋습니다. 문을 나서서 이분거리입니다. 잠자리가 날고 풀벌레소리가 들립니다. 제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도 여기저기 피었습니다. 좁은 길을 발견해 달리는데 비둘기 놈이 절대 안 비켜주며 앞서 걸어갑니다.
서울의 타워팰리스 비슷한 곳에 살던 여자가 여기서 왜 불편한 점들이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없겠습니까
싱크대 아래서 바로 분쇄가 되어 없어지던 음식쓰레기를 봉지에 담아 날라야한다는 것도 어마어마한 변화고 너무 충격받아서 아직 헬스클럽엔 등록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런 글을 남겨놓았더군요. '당신은 늘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는 다는 것.'
네 그래서 저는 어느 곳에 가서도 그 곳을 진심으로 좋아하며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곳 이 자그마한 제 공간에서 저는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오피스텔에 안 어울리게 오븐도 구입했습니다. 남들은 오븐이 왜 필요한가 하던데 저는 14년 동안 오븐을 쓰고 살았으니까요. 오븐을 구입했다니 신랑도 좋아하더군요.
오븐을 쳐다보며 그래 여긴 이제 내 집이다,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이주밖에 안되었는데 집이 빨리 구해져서인지 벌써 대충 사람사는 꼴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그릇들도 제대로 못사서 어제도 커피잔에 국과 밥을 먹긴 했지만요..^^
승질이 드러워서 절대 마음에 드는 전기밥솥을 고를 수가 없다보니 뚝배기에 밥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덕분에 누룽지를 처리하는 일이 큰 일입니다만..ㅎㅎ
위기상황을 감지한 엄마도 암 말씀 안하시고 (사실 옆에 집을 얻으면 맨날 찾아오실까봐 겁먹었었습니다)
한국에 오니 참 좋습니다..
2007.09.05.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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