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너에게..

史野 2007. 4. 16. 17:06

오랫만에 네게 편지가 쓰고 싶어

 

이 곳엔 지금 비가 내리고 있고 누군가 보내준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있어

 

어제도 술을 잔뜩 마셨는데 또 포도주를 따서 입안 가득 풍기는 향에 나를 맡기고 있는 중이야

 

질 좋은 포도주는 몸도 마음도 즐겁게 하는 마법사 같아.

 

이런 포도주를 마실 때는 담배를 피지 말아야 하는데 그럼 싸구려 포도주나 뒷맛은 마찬가지가 되어버리는데 또 슬그머니 담배 한 대 피워문다.

 

술을 퍼마시는 내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좋은 술을 가려 마시는 이성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곤 해

 

바보같지?

 

언젠가 포도주를 살 돈이 없게 된다면 싸구려 위스키 몇 잔에 취해 잠들게 되는 날이 내게도 올까.

 

노후대책이라고는 남편밖에 믿을 게 없는 나란 여자는 가끔 내 미래를 상상해 보곤 하는데 자신을 책임질만한 아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도 해.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가는 과정일텐데 나는 아직도 내가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꾸 꿈을 꾸게 된다.

 

미국에 가서 이년만 공부하고 오면 안되겠냐니까 이 남자 자긴 그게 이혼하자는 말로 들린다고 화를 버럭내더라.

 

마치지 못한 공부에 대한 미련은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가끔 나를 괴롭혀.

 

내가 감당이 안되면서도 자꾸 한일관계에 관한 서적들을 읽어대며 집착하는 건 이렇게 라도 해야한다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인지도 모르겠어 

 

몇번이나 이제 그만 복사해놓은 저 어마어마한 자료들을 버려야겠다고 결심하지만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십년 째 끌고 다니고 있다.

 

어쩌면 난 저 먼지 폴폴 나는 종이더미속에서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 계속 숨쉬고 있어주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꼭 그냥 너랑 결혼해서 한국에서 지지고 볶고 살았더라면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동물들마저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땅을 향한다는데 극복한 줄 알았던 한국음식에 목 맬때나 이렇게 자꾸 자판을 두드리며 한국어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치는 걸 보면서 내가 사실은 한국을 얼마나 그리워하는 지 절감하곤 한다

 

떠도는 삶이 지겨워 자꾸 그만 돌아가자고 말을 하지만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독일이 아니라 한국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내가 도쿄를 이렇게 좋아하는 건 한국과 겨우 두 시간 떨어진 동시간대의 장소라는 이유도 있을거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 나 내일 갈까 묻는 게 자연스러운 이 곳이 말이야

 

내가 불편함을 참아가며 집요하게 한국여권을 고수하는 건 어쩌면 돌아갈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어라는 건 생후 습득되는 게 아니라 유전자속에 박혀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해

 

리스본의 거리에서도 중국의 고대도시에서도 꼭 전생에 한 장면이었던 것 같은 친근함을 느끼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 이상하지?

 

운명같은 사랑을 했어도 운명같은 건 믿지 않았던 나인데 이젠 내게 네가 운명이라는 걸 믿어

 

진작에 너를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이제서야 말이야

 

아니 어쩌면 운명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네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는지도 모르겠다.

 

운명같은 건 믿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걸 먼저 안 건 우습게도 내 남자였지

 

너하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끝난다고 그만 열받고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웃었더랬지

 

그녀와 너는 내게 운명, 평생 지고 가야 할 업이라고 말이야

 

너때문에 한동안 너무 괴로왔다.

 

네 불행이 꼭 내 탓인 거 같아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네게 따뜻한 한마디 건넬 위인도 못되는 내가 한심해서

 

내 안타까움과 괴로움을 결국 너를 괴롭히는 거친 언어로밖에 건넬 수 없다는 것이 서러워서

 

재수없게 굴면서도 결국 힘들면 네게 손을 내미는 내가 미워서

 

그래도 늘 웃으며 받아주는 네가 짜증나서

 

그래서 울었어

 

이젠 내가 네게 했던 잘못들은 모두 잊을래

 

너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나은 인생을 살았겠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여자라곤 생각하지 않을래

 

내가 네게 늘 화를 냈던 건 사실 네게 미안했기 때문이니까

 

그래 그래서였을거야

 

네게 내 상처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건

 

아마 네게서만은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거야

 

그냥 나는 네게만은 늘 당당하고 그저 보통사람이고 싶었기 때문일거야

 

조건없어 보이는 네 사랑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일거야

 

그래서 네가 나때문에 아파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며 언제라도 네게 기대고 싶었기 때문일거야

 

그런데도 너는 그렇게 말하지

 

그런 내가 더 좋아졌다고..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래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내가 믿었던 것처럼 불꽃같은 정열이 아니라

 

오랜시간 끓다 불어터진 부대찌개 속의 햄같은 건지도..

 

이제는 너를 내게 허락한 神에게 감사해

 

난 앞으로도 너를 힘들게 하겠지만

 

이십년 후 우리가 환갑이 되었을 때

 

네가 평생을 사랑한 여자가

 

이젠 여자가 아니라 아주 괜찮은 人間이 되었다고 느끼도록 노력하며 살게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삶을 내가 컨트롤 했다고 말 할 수 있도록..

 

사실 자신은 없지만 내가 네게 진 빚은 그렇게 갚을게

 

 

 

 

우선 유월에 한국에 가서 심기일전의 의미로 마흔살 파티를 할거야

 

와서 축하해 줄거지?

 

너를 만날 유월을 기다린다...

 

 

 

 

 

 

2007.04.16. Tokyo에서..사야가

 

 

 

24355

 

요즘 내 별이 다 떨어져서 새로운 음악을 살 수가 없는데 별을 선물해주던 조카놈이 군대갔다..ㅜㅜ

 

언니

엄마의 주민번호로도 여기선 별을 살 수가 없어요..흑흑

생각보다 복잡하더라구요.

어제 술마시고 국제전화한다고 밤새 난리를 친 관계로 또 전화를 할 수는 없구요.(여행비를 전화비로 대신해야할 상황입니다..ㅎㅎ)

바쁜 병윤이 놈까지 괴롭히고 싶진 않지만 혹 병윤이가 제게 별을 선물할 수는 없는 지 알아봐주세요..^^;;;  

저는 오늘 비가 오는 관계로 여행은 못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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