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한 남자의 기억

史野 2007. 4. 14. 16:58

 

 

 

어제 눈이 퉁퉁 붓도록 실컷 울었다. 자기연민에 그렇게 운 건 아주 오랫만이다.

그 말은 사실 내 상태가 많이 좋아졌단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내가 넘 괴로운건 내 불면증이나 불안함을 내 스스로 전혀 컨트롤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늘 자기분석에 철저한 나는 이런 저런 상황을 세밀히 검토하는 편인데 언제 편안히 잘 자고 언제 잠을 설치고 그러는지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벌써 몇년 전부터 아침외에는 그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지 않고 저녁에는 가능하면 흥분을 하지 않으려 애쓰고 나름 이런 저런 노력을 하지만 무의식이랑 관계가 있는 지 내 영역밖이라 그게 힘들고 서럽다.

 

사실 잠을 잘 못잘 수도 있는건데 자라에 놀란 가슴 솥뚜겅보고 놀란다고 그게 계속될까봐 더 겁을 먹는 것도 있다. 수면제를 장기복용한 탓에 내겐 어떤 수면제도 듣지를 않는데다 (십년간 안 먹었으니 이제 들을 지도 모르겠다만..^^) 독일에서 정신과 약에 폐인이 되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약에 도움을 청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기때문이다.

 

신랑이랑 더 나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는 낫지도 고칠 방법도 없는 내 이 절망스러운 상태.

 

어쨌든 또 남자이야기인데.ㅎㅎ

 

내 불면증이 최고절정에 달해서 거의 삶을 포기하고 술만 마시던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가 그렇게 괴롭다는 건 사실 식구들을 제외하곤 주변사람들은 거의 몰랐다.

 

내가 뭐 굳이 숨기고 싶었다기보다 아무리 내가 비정상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실제로 실실대고 웃는 편견속의 미친X는 아니었던 관계로 아무도 믿어주지도 않았다.

 

하긴 내가 상담을 받았던 정신과의사마저도 아무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누가 믿어주길 바랬겠냐만.(내 남자표현에 의하면 그건 함께 살아봐야 안단다..-_-)

 

나는 잠을 전혀 못자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니 미치도록 괴로왔고 그래 술만 퍼마시며 삶을 놓았다.

 

그 남자는 내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는 당시 늘 술친구가 필요했고 그게 사실 누구라도 상관은 없었다. 치사량만큼 술을 마시고 어떻게든지 쓰러져 자야했던 날들.

 

어느 날 처음으로 둘이 술을 마시다가 나는 이 남자에게 찍혔고..^^ 그는 내 남자친구와 혈투를 별여서(황당하고 웃기지만 사실이다..-_-) 내 술친구의 자리를 당당히 획득했다.

 

난 정말 당시는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는데 남자친구가 그 남자를 죽도록 팼다는 이야길 들은 후 그 남친이 싫어졌다.

 

그 남친은 당근 남사스럽게 우리집앞에 와서 진을 쳤는데 그때 우리엄마가 아니 살다가도 헤어지는 세상에서 만나다 싫다는데 저런 멍청한 놈이 있냐고 너는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나가서 한마디 해주고 오겠다고 하셔서 감동했다. 내가 울 엄마 열나게 욕하지만 가끔 우리엄마가 참 멋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 딱 그랬다. 

 

어쨌든 둘이 술을 마신건 아니고 그녀까지 셋이 날이면 날마다 술집이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술을 마셨는데 내 그녀는 당시 내가 그렇게 아픈 것도 우리 둘이 사귀는 것도 몰랐단다..^^;;

 

가장 절실했던 게 난 그때 잠을 자는 거였고 신기하게도 교회에 가면 몇 시간이나 잠을 잤다.(그렇게 종교에 의지하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기독교인임을 포기한 이 후 훨씬 더 잘 잔다만) 그래 밤마다 철야기도회를 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가기 시작했는데 거긴 또 자는 사람을 돌아다니며 깨운다..-_-

 

그래서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 남자가 나랑 교회에 가서 교인흉내를 내며 내 대신 밤을 새웠고 누가 나를 못 깨우게 파수병 역할을 해줬다.

 

지금도 바닥에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깨어보면 졸음을 참으며 찬송가를 따라부르는 흉내를 내던 그가 괜찮다고 더 자라고 웃어보이던 얼굴이 생각난다.

 

그렇다고 날마다 교회를 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잠들 때까지 전화통화를 해주기도 했는데 어느 추운 겨울 날 전화부스에서 다섯 시간을 그 찬바람을 맞으며 있었던 적도 있다.(아 내가 이 전화로 괴롭힌 인간들은 너무 많고 나 벌 받을거다.그래서 내 남자는 지금도 전화비로 내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정도..-_-)

 

원래 마른 남자가 더 말라갔는데도 불평 한 번 하는 걸 못봤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난 그 남자랑 결혼할 생각이라 그 집에 인사까지 갔었는데 자꾸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지 그와 행복할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을 꿈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혼을 하고 어느 봄 드물게 찬란했던 날, 복도 가득히 쏟아지는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자기 그 남자 생각에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이 뭐라고 그의 그 헌신적인 면만으로도 난 그와 결혼해서 갚았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새삼스러운 후회였달까.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어제 울다가 이 남자가 또 생각났다. 그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요즘은 내 남자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해서 미치겠다. 나는 그 남자를 내 남자만큼 사랑하진 않았지만 내 남자는 사랑하니까.

 

예민한 이 남자는 내가 잠을 설치면 자기도 잠을 설치는데 13년이 넘는 시간속에서 단 한번도 얼굴을 찡그린 적이 없으며 내가 푹 잔 날은 늘 변함없이 아이처럼 기뻐한다.

 

술담배에 찌들어사는 마누라를 참다 참다 가끔씩 눈물을 글썽이며 네 건강이 걱정된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래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보단 알콜중독자로 사는 게 낫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아픔에 공감을 해주는 남자.

 

내가 의기소침해 있으면 잠옷차림에 머리가 산발이더라도 와 우리 이쁜 마누라는 그냥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다, 고 말해주는 남자.

 

자기가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도 아니면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묻는 남자. 그래서 사랑이 크면 슬픔도 크다는 가을바람님의 답글처럼 내가 더 힘이 드는 지도 모르겠다.

 

둘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지만 가장 처절했던 내 모습을 요란스럽지 않게 그저 묵묵히 지켜주는 면에선 참 많이 닮았다.

 

세상엔 누구나 지고 가야할 짐이 있기에 징징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 좋은 것만 생각하고 살고 싶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 삶이 저주스러울 때가 있다.

 

삶에 크게 기대하는 것도 없는데 그냥 남들처럼 평범한 신경줄만 가질 수 있다면...

 

아니 적반하장이게도 이렇게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강인한 정신력이 없었더라면, 온전히 미쳐버릴 수 있다면 바랄 때도 있다. 특히 애쓰는 마누라를 바라보다 신랑이 눈물을 삼킬 때는 그냥 미쳐버릴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그 옆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포기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 생에선 사람이 아니라 나무로 태어나면 좋겠다.

 

그럼 지금보다 더 외롭고 힘들까.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던 그 남자는 잘 살고 있을까. 우리가 만난 시간은 일년도 안되는데 내 병과 함께 기억속에 깊이 각인된 남자. 

 

내 생에서 너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일순위로 떠오를 남자.

 

나는 가끔씩 그를 기억하고 가슴이 서늘해지곤 하지만 그는 나같은 여자는 까맣게 잊고 그저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좋겠다.

 

아니 이 글을 쓰다보니 그를 꼭 한 번은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 그때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이제 잠도 잘 자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2007.04.14 Tokyo에서..사야

 

24280

 

 

 

 

 

 

내일일찍 신랑은 홍콩으로 떠나고 저도 어딘가를 정한 건 아니지만 그 사이에 가출한 자신감을 찾아 떠나볼까 생각중입니다.

 

아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신감이 일본땅 어디로 가출을 했겠습니까만은 새로운 땅을 떠돌며 내면을 바라보며 자신추스리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자신감을 좀 찾아볼까 싶어서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고 조금씩 늘여가고 있는 중인데 이번엔 약발이 잘 안먹히네요 

 

 

저를 아끼는 몇분 포함 특히 가족분들, 이런 글 올린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나쁘지 않고 견딜만 합니다.

 

나는 왜 남에게 걱정이나 끼치는 인생을 살아야하나 그것도 절망스러웠는데 그냥 걱정 좀 시키면 어때. 배째 분위기로 바꿀려고요..ㅎㅎ

 

오랫만에 사진기 없이 여행을 떠나볼까 고민중이긴 한데 그럼 후회하겠죠?

 

참 여행 안가고 그냥 집입니다 뭐 이런 글을 올리더라도 너무 한심해 하진 마세요. 집에서 혼자 편히 잘자고 잘 지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 사실 제겐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이거든요. 거기다 이번 주에 생일만 셋인데 선물을 하나도 안 보냈어요..이틀동안 돌아다니다가 겨우 대자 선물 하나 샀습니다..ㅜㅜ

 

어쩌면 여행비로 신랑없는 틈을 타 비싼 포도주를 양껏 마셔볼 지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포도주 중독인데 둘이 마시면 돈이 두 배로 드는 관계로..ㅎㅎㅎ

 

'먼지 묻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에게..  (0) 2007.04.16
우리부부의 희망..ㅎㅎ  (0) 2007.04.15
보낼 수 없는 편지 2  (0) 2007.04.13
그래 나도 변했다  (0) 2007.04.09
삼 일간의 처절한 투쟁  (0) 2007.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