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타인의 삶'을 봤다는 몽님의 댓글을 읽으며 자기 방에 있는 신랑에게 외쳤다
'자기야 세상에나 한국에서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을 한다는데 그럼 여기도 하지 않을까?'
'그 영화 나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랬으면 좋겠다'는 신랑의 대답.
부활절이야기 올리면서도 썼지만 나는 한심한 가정주부다.
지갑에 얼마의 돈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며 술값외엔 알고 있는 식료품 가격이 없으며 다림질이 하기 싫으면 삼주씩의 셔츠가 슬그머니 신랑옷장이 아닌 내 옷장으로 사라진다.
그렇다고 뭐 내가 허구헌날 개판만치고 살겠냐. 인생은 순간이 중요하단 철학(!)으로 뭐 나름대로는 애쓰며 살고 있다..^^
그래 신랑이 너무 보고싶은 영화라는데 이런 경우는 당근 잘 챙겨야지..ㅎㅎ 당장 영화검색에 들어갔는데 못 찾겠는거다.
벌써 일년된 영화인데 아 한국은 상을 타니까 개봉을 하고 일본은 벌써 지나갔나보다란 생각.(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 미안하다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라 나도 어쩔 수가 없다..-_-)
월요일아침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까막눈 주제에 일본야후를 헤집고 다니는데 전혀 엉뚱한 제목으로 하고 있는 걸 발견. 독일어 영어 한국어까지 다 같은 제목인데 일본제목만 '좋은 사람을 위한 소나타'(善き人のためのソナタ )로 시부야의 어느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거다
당장 신랑에게 전화를 해서는 다음주 출장이니 지금 보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고 보기로 결정. 나는 가본 영화관이지만 워낙 복잡한 위치라 설명을 할 수는 없고 내가 미리 표를 사놓게 시부야역에서 만나자니 이 남자 그 복잡한 곳에서 어떻게 만나냐며 난색을 표명. 그래 109백화점 아니 분카무라앞 어쩌고 하다가 내가 표를 사놓고 택시를 어디서 내리는게 가장 좋은 지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하고 끊었다.
영화관을 찾았으니 기분도 좋고 운동하고 와서 일찍 나가 분카무라에서 한다는 트레이너가 알려준 전시회도 보고 어쩌고 할 생각이었는데 앗뿔사 얼마전에 신랑이 구입한 무라카미류의 미소스프를 읽다보니 몇 시간이 훌쩍 가버린거다.
놀래서 샤워하고 택시를 탈까했더니만 퇴근시간이라 포기하고 시부야에 도착해 표를 구입했더니 여섯시 사십분.(영화상영은 7시 25분) 왜 하필 그럴때 공중전화가 없는거냐 옷도 얇게 입고 나갔는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서점안에서 전화기를 찾아 6시 오십분에 전화를 걸었더니 응답기가 돌아간다.
7시 10분정도에 만나자고 말을 했으니 이 시간 잘 지키는 남자가 벌써 나간건가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며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니 어디서 만나는 줄 알고 나갔단 말이냐. 여기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랑이 나갔다면 자기 휴대폰을 믿은 거겠지만 나는 신랑의 휴대폰번호를 모른다..-_- 도쿄에 와서야 우리가 밖에서 만나봤자 산토리홀앞이 아니면 롯본기 초밥집앞.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나와서 담배를 한대 피우는데 마침 또 정말 영화처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야 날씨가 흐리니까 혹시하는 생각에 우산을 들고 나왔지만 신랑이 우산을 가져왔을 가능성이야 당근 제로.
이거 시어머니에게 국제전화라도 해서 번호를 물어봐야하나 싶은데 시어머니가 신랑휴대폰번호를 알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카드엔 충분한 금액이 들어있지도 않은데다 어디서 또 공중전화 카드를 사야하는 지도 모르겠고..
비는 방울이 아니라 이제 쏟아붓기 시작하는데 그 복잡한 시부야에서 미치고 팔짝 뛰겠는거다.
비도 오니까 신랑이 혹시 내 전화를 기다리며 시부야역 같은데 있지 않을까 싶어 시부야역으로 또 109 백화점앞으로 몇 백미터를 왔다리 갔다리 하다보니 시간은 흘러 흘러 영화상영시간.
젠장 이런 기분으로 혼자 영화볼 생각이야 전혀 없고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갈 생각도 없고 어떻게 이렇게 너는 한심하냔 생각으로 술이나 퍼먹을 생각을 하는데 비에 젖어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남자랑 기적같은 조우를 했다.
순간 시계를 보니 7시 28분. 너무 화가나서 그 화의 기운이 내게까지 뻗쳐올 것같은 내 남자의 표정이 문제가 아니다.
자기야 빨리 가자..ㅎㅎ
신랑에게 우산을 받쳐주며 골목을 헤집고 걷는데 이 복잡한 곳에서 그래도 만났다는 사실에 자꾸 피실피실 웃음이 나온다. (화가 잔뜩 난 내 남자에겐 말을 안시키는게 상책이다) 영화관에 도착을 해서 우리 자리고 뭐고 빈자리 찾아 앉으니 본편상영전.
슬그머니 얼굴이라도 닦으라고 휴지를 건네고 우리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
영화는 두 말이 필요없다. 안보면 모르니까 후회까지야 안하겠지만 단언하건데 손해다..ㅎㅎ
왜 일본만 저런 웃기는 제목인가도 영화를 보다보니 의문이 풀린다. 단하나 여주인공역의 마티나 게덱.(Martina Gedeck) 사년전에 그녀가 나왔던 영화 벨라 마타(Bella Marta)를 보았었는데 그 사년사이에 늙어도 너무 늙어버려 충격먹었다.
그사이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버렸고 내가 좋아하는 골목중 하나인 곳 이런 멋진 극장에서 그것도 독일어로 이렇게 근사한 영화를 보았는데 그냥 집에 갈 수는 없지.
골목속에 새로생긴, 술집이름도 '인간관계'인 곳으로 들어가 앉아 그제서야 배가 고픈 우리부부는 술을 마시고 이것 저것 시켜먹으며 영화이야기를 하다 엇갈린 우리 약속이야기를 하다 그랬다.
너의 아빠 이름이 뭐냐고 물을려다 네 공이름이 뭐냐고 묻는 장면 이야기에선 마구 웃고 fuer(위하여 혹은 에게라는 독일어전치사)라는 단어의 묘미가 절절한 마지막 장면엔 둘다 감탄하며 독일사람들도 영화를 잘 만들땐 정말 잘 만든다는 말도 하고..^^
외국을 떠돌다 만나는 독일영화는 고향까마귀를 만난듯 반갑다는 이야기를 하며 고향까마귀의 의미를 설명해야하는 서러움도 맛봤다.(독일은 까치가 흉조다..ㅎㅎ)
어쨌든 안그래도 전화에 약속장소를 왜 세 곳이나 이야기했나 후회스러웠는데 내가 시부야역에 가는 사이 신랑은 109로 내가 109로 가는 사이에 신랑은 분카무라로 이렇게 삼십분을 넘게 헤매다녔단 이야기.
나는 앞에 두 개만 기억하고 신랑은 당연히 마지막에 이야기한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전화는 안오고 시간은 다가와서 109도 왔다갔다 했다나.
뛰어다니며 속이 탈 때는 내일 당장 휴대폰을 산다고 결심했더랬는데 막상 영화보고 나와서 술을 마시다보니 예전엔 다 이렇게 살았는데 싶은게 또 휴대폰 없이 살아도 되겠다 싶다. 어쨌든 앞으로 시부야에서 만나기로 하면 무조건 109앞으로 하기로 합의를 봤다.
(아 그래도 신랑의 휴대폰번호는 꼭 적어가지고 다녀야지..^^;;)
2007년을 그것도 아프리카도 아니고 메트로폴리탄 도쿄에서 사는 여자가 휴대폰도 없고 신랑 번호도 못 외워서 시나리오에 물뿌리는 차 등장이 써있는 것처럼 딱 마침 그때 쏟아져 내리는 빗속을 헤매고 다니다 그 많은 인파속에서 신랑을 만난 이야기.
약속이 어긋나고 시간의 차이로 하나는 이리로 하나는 저리로 그 빗속을 왔다리 갔다리 했다니.
그냥 내 인생자체가 영화다..ㅎㅎㅎ
2007.04.10. Tokyo에서..사야
사진은 작년 브레송의 다큐멘타리 영화를 본 날 찍은 것들로 빛바랜 사진으로 재 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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