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 출근을 하니 갑자기 주말 내내 머리에 가득하던 고민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내 남자. 유감스럽게도 월급서열로 따지면 도쿄지사에서 한참 밀리지만 지위는 꽤 높다. 그리고 신랑이나 나나 대충 이 선이 신랑이 승진할 수 있을 만큼 했다고 믿고 있는 상태.
아시다시피 지난 번 신랑이 아태지역에서 밀렸고 도쿄 내에선 승진을 해서 (위로성이다만..ㅎㅎ) 그저 만족하고 있었다.
문제는 신랑이 아직 젊고 또 벌써 주재원생활만 올해로 십년 째. 계속 떠돌기도 애매하고 돌아가기도 애매하고 앞으로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뭔가 앞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내 남자를 밀고 들어온 그래 지금 신랑의 보스가 된 이 남자가 신랑에게 앞으로 승진을 할려면 성격개조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거다..ㅜㅜ
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내 남자는 일단 별 야망이 없고 아부할 줄도 모르고 이기적이지도 않고 그저 죽어라 일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그런 내 남자가 좋다만 이 사회에서 적합한 그런 성격은 아니다. 그때도 썼지만 전무이사가 본사에서 와서 너무 비싼 밥 먹었다고 흥분해서 싸인을 거부하는 쫄다구가 어디있냐? ㅎㅎ
이건 아버님께 물려받은 유전자이기도 한데 우리 아버님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군청에서 도청으로 승진을 하셨는데 그냥 난 이 조용한 곳이 좋다고 거절을 하셨단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솔직히 나는 충격 받았다. 거기다 신랑이 대학생 때 거래처에 아르바이트자리를 부탁했는데 역시 단칼에 거절하셨다니.
사람이 어찌 다 같을 수가 있는가. 생긴 대로 사는 거다. 그래 내가 여태 써온 내조법은 그림자내조.
신랑이 하는 일에 무조건 찬성. 집에 오면 최대한 마음 편하게 해주기. 너무 힘들어할 때는 사표내도 된다고 말해주기. 신랑 장점만 디립다 칭찬하기..등등.
억지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남자가 여기까지 와준 것 그리고 이 진흙탕에서 소신을 지키며 잘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나게 고맙다. 그래 잔소리는 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주말에는 식사부터 커피까지 모든 걸 컴퓨터 앞으로 배달해주고 그냥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놔둔다.
이 정도 위치에서 우리처럼 사람 안 만나고 사는 사람들도 없고 우리처럼 안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없다. 한국같으면 상상도 못할, 차도 없지 골프도 안치지. 답답할 때도 있지만 그저 그게 내 남자 스타일이려니 한다.
그냥 나라도 외국어 열심히 해서 실생활에 편리하게 해주고 문화생활 가끔 하게 해주고 눈치봐가며 온천여행 예약하고 혹시 신랑이 나가잘 때 대비 좋은 곳 알아놓기. 즐거운 하루 보내서 신랑 신경 안 쓰게 해주는 것.
물론 나도 잘하는 건 없는 게 한국처럼은 아니어도 여기도 인간관계가 중요한데 나 역시 수동적이다. 그때 그 높으신 분 마누라 왔을 때도 그랬고 도쿄처음 와서 지사장부부에게 초대받았을 때도 전화하라고 명함까지 준 지사장마누라에게 단 한 번도 전화를 해본 적이 없다..-_- 그 지사장마누라는 리즈의 친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그러고보니 리즈랑은 친하긴 했어도 더했다. 그땐 정말 리즈가 그렇게 너 만나고 싶어 난리인데 왜 그렇게 튕기는 거냐고 신랑이 엄청 속상해 했다. 그때 내가 한 대답은 그래서 라고 바로 걔가 자기보스 마누라이기 때문이라고..ㅜㅜ
그렇다고 뭐 내가 개판만 친 건 아니다. 특이한 여자-리즈편에도 썼지만 그래도 리즈랑 잘 지냈고 회사사람들 모임있을 때면 그 마누라 끝내주더라 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물론 저 사진을 찍은 날은 신랑표현에 의하면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로 취했다더만..-_- 그래도 다음 날 보스가 홍콩으로 출장올 때 나도 데리고 오라고 자기부부랑 넷이 만나자고 했다니 큰 실수를 한 건 아니지 않은가..ㅎㅎ
각설하고 승진은 고사하고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내 남자나 나나 변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 건지 잘 모르겠다.
신랑의 성격개조 혹은 스타일개조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야 하는 건지 지금처럼 무조건 지지만 해줘야 하는 건지. 내가 잔소리를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라 남에게도 안 하지만 난 우리 엄마를 닮았기 때문에 본성자체는 잔소리꾼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탱자팔자로 사는 것도 좋긴 해도 또 빡세게 살라면 살 수 있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확 달라져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내 남자가 이사가 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건 타고 나는 거다.
내 남자가 연봉 때문에 속상해 할 때 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이 딜러들처럼 그런 스트레스 안받고 그렇게 재수없는 인간이 아니라서 난 정말 다행이라고(아 모든 딜러들이 재수없다는 건 아니고 그냥 우리가 겪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니 오해말길)
내 남자보다 겨우 한 단계 위인 저 보스 아니 우리 오빠 사는 모습만 봐도 입이 벌어진다. 무난한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란 내 남자는 그 무난함의 한계를 벗어나긴 힘들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말하자면 끌려 다니며 그래도 만족하며 살았는데 미래가 불안한 나이 사십대 초반.
이 웬수땡이 남편은 내가 그렇게나 도쿄 연장하지 말고 그냥 오퍼왔을 때 룩셈부르크라도 가자고 일단 유럽으로라도 돌아가자고 부탁할 때는 싫다더니 이제야 후회하고 있다..-_- 이런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그럼 난 또 그냥 강요할 걸 그랬나 후회하고..ㅜㅜ
아 정말 어떻게 해야 신랑에게 스트레스는 안주면서 적극적인 내조도 하는 현명한 마누라가 될 수 있을까나.
고민하는 신랑에겐 무조건 자긴 잘할 수 있다고 늘 지지해 주는 나같이 멋진 마누라도 있지 않냐고 웃었는데 실제로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월요일이고 그래도 태양은 떠올랐으니 또 운동도 하고 마사지도 받고 일단 이 하루를 잘 살아내야겠지.
2007.02.05 Tokyo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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