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소리를 닮은 문장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허만하
2006.05.16 사야
이 책을 읽고는 몇 일내내 집히는 데로 첼로음악을 들었다. 바흐부터 브리튼에 이르기까지 시대는 상관이 없었다. 원래 첼로소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았다는 그 첼로소리는 시인이 조근조근 풀어놓은 이야기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바이올린소리처럼 위태로운 화려함도 아니고 콘트라베이스처럼 속을 긁어대는 처절함도 아닌.. 때론 무반주로 때론 피아노소리에 섞여 가끔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겨루며 감미롭게도 격하게도 울리는 첼로소리. 그의 문장은 편안하게 앉아 온몸으로 첼로를 감싸고 혼신으로 연주하는 그 소리를 닮아있다.
나는 허만하시인을 잘 모른다. 에세이종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나도 생각이 잘 안나는데 아마 '낙타는 십리밖 물냄새를 맡는다'는 멋진 제목때문이 아니었을까한다.
나른한 저녁 머리깨지는 책을 읽다말고 가벼운 읽을거리가 필요하단 생각에 쌓인 틈바구니에서 찾아낸 이 책은 그러나 가벼운 읽을 거리가 아니었다.
그저 내게는 별 유명하지 않은 시인이었던 그가 병리학자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물론 병리학자라고 시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왠지 내겐 어울리지 않는 낯설음이었다는 것도 고백해야겠다.
그렇게 약간의 편견으로 시작한 이 책을 읽다가 나는 자꾸 앞면을 들춰 주름가득하긴 하나 형형한 눈빛과 지적 분위기로 충만한 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씌여진 1932년생이라는 숫자도..
그는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성장하고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근현대사를 산 증인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그런 궁핍과 처절함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대화로만 봐도 그는 한학이 중요했던 그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므로 한학쪽으로 자연스레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도 나름 여유로운 삶을 통한 교양도 풍부해 보인다.
그렇다 그의 책을 내내 관통하는 그의 시각과 깊은 사색의 바탕에는 피해의식이나 왜곡된 편견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내가 만난 (책으로든 실생활에서건) 그 나이 한국인이 아닌 독일인들과 더 닮아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보통 여유있는 사람들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한 삶의 가벼움같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몫이 아니다. 글에서 몇 번 언급되는 어린 동생의 죽음으로 그가 더욱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며 사색적 인간이 되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볼 뿐이다.
흥미롭게도 근 이십년간의 세월을 나눠 쓰여진 글들이 보기좋게 섞여있는데도 불협화음이 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또 뒤의 년도를 확인해가며 읽어나가야했다.
그 오랜 시간 변함없이 시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그의 흔적, 신라의 와당에서부터 문학과 철학 회화를 넘나들며 천착하는 그의 사유를 때론 힘겹게 때론 나역시 그만큼의 열정으로 따라가 보았다.
잘 모르는 사람임에도 글과 사람이 일치할 것 같은 근거없는 확신이 드는 그런 문장을 만나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문장이 번역된 문장이 아니라 한글로 씌여진거라는건 큰 위안이다.
글쓰기는 결국 숨길수 없는 사유의 흔적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게 자갈돌 부딪히는 시냇물에서 흐르는 소리인지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는 소리인지 느껴지는게 글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건 발가벗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글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읽는 이의 폭만큼 다시 태어나는 것.
어떤 형태로든 공개된 장소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부끄러움에 합해 오년마다 한번씩 시인의 문장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뜬금없이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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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책에 허만하시인의 이 책이 언급되어 있길래 작년에 쓴 독후감을 찾아왔다. 작년에 다른 사이트에 올렸던 독후감이 꽤 되는데 그 곳은 폐쇄했지만 한꺼번에 여기 옮겨다 놓을 수는 없고 이렇게 기억을 상기시키는 일이 있을때나마 하나씩 옮겨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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