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묻은 책장

신경정신과와 기억에 대해

史野 2006. 10. 26. 12:49

요즘은 분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보통 신경정신과라 불리던 병원.

 

그 곳을 처음 가 본게 아마 고등학교 2학년때가 아닌가 한다.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던게 이유였는데 어쨌든 뇌파검사를 해도 (이건 신경과) 상담을 받아도(이건 정신과) 내 병은 원인을 찾을 수도 나아지지도 않았다.

 

독일에서는 갑자기 두 번이나 그냥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해 앰블런스에 실려가는 일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두 번다 옆에 계셨던 울 시어머님 표현에 의하면 갑자기 툭하고 쓰러져 정신을 잃더라나.

 

이 글을 쓰니 생각이 나는데 두 번 쓰러진 후 시부모님이랑 프랑스 브르타뉴지방으로 휴가를 갔었다. 파도 세고 험하기로 유명한 해안에 신랑이랑 올라 갔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어머니랑 소리지르고 싸웠다..-_- 거기서 쓰러지면 그냥 죽는 거라고 그렇게 올라가지 말라는데도 올라간 건 내가 당신을 열받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마구 열을 내시던 어머님..ㅎㅎ

 

어쨌든 CT촬영도 했으나 뇌에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가 없었고 두통은 어찌 사라졌으나 예민한 신경에 따른 불면증은 지금까지도 불치병이란 생각으로 나름 조심하며 살고 있다.

 

정신과는 상담도 받아보고 병원에 입원도 해보고 해서인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신경과는 내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문과이긴 했어도 학교다닐때 수학이나 물리 이런 점수들이 무진장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내겐 도저히 접근해볼 수 없는 분야가 있다면 의학이나 과학쪽이다.

 

시사잡지를 읽어도 그런 쪽은 무조건 건너뛰기 일쑤고 간신히 조금이나마 읽게 되는 건 정신분석학회에서 하는 뇌파실험같은 것에 대한 연관기사가 전부.

 

인간이 결국은 뇌를 빼면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울진대 인간 혹은 나를 이해할려고 발버둥치는 내가 어찌 이렇게 그 쪽에는 무관심한지 알다가다 모를 일. 이렇게 거부반응을 갖고 있는 것도 결국은 어떤 트라우마랑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다보면 다시 정신분석학으로 돌아오는 악순환(?).

 

그러다 얼마전 '신경과의사 김종성 영화를 보다'란 책을 읽었다. 아무래도 전문서적이 아닌 영화속 인물들의 신경과적 질병을 논하는 책이니 읽기 쉽겠다 싶어서 말이다.(이것도 사실은 그런 의도로 사놓은 지는 한참되었는데 계속 찬밥이다 간신히 간택을 받은거다.)

 

다행인건 책이 무진장 쉽고 흥미로왔다는 건데 무엇보다 내게 흥미를 끈건 기억에 관한거다. 그러니까 뇌에서 각자 관여하는 부분이 다른데 기억같은 경우 단기 기억, 장기 기억, 습관성 기억 뭐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 곳이 나눠져 있다니.

 

삶이 진행된다는 건 간단히 말하면 기억이 쌓인다는 것이고 그 기억속에서 '내'가 규정지어 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이 컴퓨터처럼 그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이나 그 기억이 떠오르는데 내가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그 기억은 나의 기억일까 아닐까.

 

가끔씩 그런 기억과의 예정없던 마주침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빼어든 씨디에서 그 씨디를 처음 듣던 딱 그 날의 그 분위기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처럼 내 앞에서 어른 거릴때, 혹은 지난 번 리스본여행에서도 썼지만 전혀 가 본 적이 없던 어느 도시에 내렸을때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라던지 말이다.

 

여행기에 쓰진 않았지만 거기서 꿈을 꾸었더랬는데 전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인터넷 한국지인과 상해에서 잠시 중국어를 함께 배우던 어느 일본아줌마 (마유미가 아니다) 가 동시에 나타났더랬다.

 

전자야 어쨌든 내가 경험했던 것이니 뇌의 어느 구석에 밀려있다가 음악이라는 기제로 인해 떠올랐을 수 있지만 후자는 과연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그리고 내 뇌속에선 어떤 정보가 저장되어있길래 그렇게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며 나타나는 걸까.

 

물론 이런 생각엔 끝이 없다. 전문가들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뇌니 말이다.

 

아무리 백년도 전에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내놓았다고 해도 그동안 우리가 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도 종교가 아직도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거겠지.

 

배용준을 한류스타로 만든 겨울연가에서도 준상이는 결국 민형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게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다 싶다.

 

전생의 나라는 것도 결국 레테의 강물을 마셔버린 이상 '나'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산다는 건 결국 나를 찾아가는 길일텐데 무방비상태로 마주치는 기억속에서 가끔 난 그 길을 잃는다.

 

 

 

 

 

 

 

 

2006.10.26 Tokyo에서 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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