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에서의 단상

내 결혼이야기 그리고 민족의식

史野 2006. 12. 12. 13:22

 

얼마전에 박노자씨가 쓴 한국사람들은 국제결혼을 개인적 문제가 아닌 민족적 혹은 국가적문제로 이해한다는 뭐 이런 맥락의 글을 읽었기도 한데다 모님방에서 일도 있었고하니 한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되고 내 결혼이야기가 떠오른다.

 

지금이야 농촌부터 시작해서 국제결혼이라는 게 별 대단한게 아니지만 내가 결혼했던 93년도만 해도 특히 나같이 서양놈(!)이랑 결혼을 하는 여자는 딱 양공주란 분위기

 

강력한 집안의 반대도 그랬지만 길거리에서나 결혼수속을 밟으며 받았던 내 수모는 지금생각해도 눈물나니 생략하기로 하고, 나도 내가 외국인이랑 결혼을 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주변사람들도 놀랍긴 했겠지만 내 주변에서 생긴 황당한 에피소드들만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내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때 들은 가장 충격적인 반응은. 미.친.년.

 

나는 내가 욕을 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듣는 것도 싫어하는 지라 (누가 욕듣는 걸 좋아하겠냐만) 저 말에 무지 충격받았다.

 

만약 내가 내 남자보다 훨씬 못하고 아님 재수없는 한국인이랑 결혼을 했어도 저런 말을 들었을까? 저 말을 했다는 사람은 물론 내 남자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재밌었던 건 내가 내 남자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듣고 난 주변인들의 반응이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청혼은 처음 받아봤다. (이거야 말로 당근이지 그럼 12살때 청혼을 받겠냐만.ㅎㅎ)

 

정말 나쁘게 말해서 내가 내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니 개나 소나 자기랑! 결혼을 하자는 거다

 

제일 코미디였던 건 나랑 같이 근무하던 별로 친하지도 않던 내 후배가 내가 어떤 독일남자랑 결혼을 하게 되어 직장을 그만둘거라니까 너무 황당해하며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대신 자기 오빠를 소개해주겠다는 거다

 

아니 내가 남자친구가 없냐? 아님 결혼하고 싶어 환장을 했냐? 단지 내 남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나는 도매금에 팔려가도 되는 건가? 외국인하고 결혼을 할거면 나랑 하자는 사람이나 내가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을 하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자기오빠를 소개해주겠다는 사람이나.

 

신랑을 만났을 때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니가 언제 남자친구가 없었던 적이 있었더냐? ㅎㅎ) 다른 친구(성은 남자인데 친구)가 '저런 바보같은 놈 너를 못 잡아 외국놈에게 뺐기냐' 하는데도 충격.

 

애초에 내 남자는 어떤 남자로서 혹은 어떤 인간으로서의 가치평가가 아닌 외국놈으로서만 존재했다는 것.

 

어쨌든 구구절절 개인사는 빼고 그 친구였던 남자친구는 내 남자의 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우리 세 사람이 피말리는 시간을 보낼때 내 친구의 후배왈.

 

형. 한국인의 명예를 걸고 꼭 누나를 잡으세요!

 

아니 내가 그 남친이랑 결혼을 하건 내 남자랑 결혼을 하건 그게 한국인의 명예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 결혼이 무슨 올림픽경기냐?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내 남자가 쓴 말중에 참 기억에 남는 말이 있는데

 

서양에선 한 여자를 상대로 두 명이 싸우다가 전혀 다른 곳에서 누군가 나타나서 그 여자를 데려가면 아무도 진게 아니라는 거다. 근데 한국은 자기들 끼리 싸우다가 이방인이 나타나니 그 이방인을 향해 뭉쳐 대항하는게 신기하다고. 그 이방인인 자기만 무조건 나쁜 놈이 되었다나

 

심지어 내가 아는 한 선생님은 독일에 오래 사셨던 어떤 교수님까지 동원해서 내 결혼을 말리셨는데 조국을 이렇게 내팽게치고 가는게 아니라는거다. 아니 이번엔 내가 무슨 독립운동가냐?

 

내가 내 남자랑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내 마음을 정하는 것도 무지 힘들었지만 저런 주변의 분위기도 참 힘들었다.

 

이게 나만 겪은 건 아닌게 어떤 국제결혼을 한 여자는 '너는 단군의 피를 배반했다'란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래서 예전에 그녀가 운영하던 '단군의 피를 배반한 사람들' 이라는 카페도 있었다..-_- 

 

도대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인 결혼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황당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다니.

 

아시다시피 나는 떠돌며 오대양육대주 정말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우리나라사람들처럼 그렇게까지 민족이라는 이름만으로 똘똘 뭉치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심지어 국가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중국사람들도 그렇진 않았다는 것.

 

물론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다 그 나라의 평균은 아니니 일반화하기에 어려운 점은 있지만 말이다

 

나를 만난 사람중에도 한국인이 내가 처음이었던 사람이 대부분인데 내가 한국인의 평균인가?

 

나만보고 한국을 보면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다..ㅎㅎ

 

예전에 언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마리아네가 세상에나 날더러 '영어랑 한국어는 그렇게 다르다면서 그리고 너는 학교다닐때 미국이나 영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냐고 한국학교의 영어교육이 굉장히 잘 되어있나보다.' 하더라는 것.

 

하하 이거야말로 오해로 따지면 금메달감 아니 기네스북감 아닌가.

 

한국인들이 아무리 좌우로, 혹은 경상도 전라도로 나뉘어 싸운다고 해도 모두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한국학교의 영어교육이 잘되어있다고? 오 노!

 

근데 마리아네말이 맞다. 나는 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데 회화가 가능했으니 공교육이 잘된거다..ㅎㅎ

 

얘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지만 우리를 이렇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지 늘 궁금한데 이유를 모르겠다.

 

너무 당하고만 살았기때문일까? 

 

그렇게 뭉치고 한국인을 향한 어떤 비판에도 부르르 떨면서 왜 또 나와사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싸우는 모순은 있는 건지.

 

나라를 옮겨다닐때마다 단 한 번도 한국인 조심하란 이야기를 안들어본 곳이 없으니, 그것도 외국인이 아닌 같은 한국인이 처음 온 사람에게 하는 충고랍시고 해주는 말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를 보고 나는 소름이 끼쳤더랬다. 거긴 이성도 이념도 뭐도 없고 단지 내 집안을 살릴 내 동생만이 있다. 그 내동생을 살리기 위해선 오늘의 아군이 내일 적군이 되고 다시 그 아군에게 총을 쏘아대는데 그런 영화가 감동적이라니. 

 

내가족 내 이웃 내 나라만 잘먹고 잘 살 수 있다면 어떤 범죄도 용서가 된단 말인가?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너는 한국인 아니냐?란 말을 들어야하는 내 나라.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속,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고 정이 많은 민족이라는 환상속에서 살고 있는 내 민족. 피해의식이 자랑인 내 민족.

 

몇 번 언급했지만 나는 한국에 사는 사람과 달리 한.국.인.이라는 자각을 늘 하고 살아야하고  한.국.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하는 처지인데

 

그래 나름 한국인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한국을 제대로 알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더랬는데

 

저 끈끈한 우리의 민족의식과 배타성이 가끔은 부담스럽고 지친다.

 

국회에서 신발이 날라다니면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야 열받고 말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 티비장면을 본 내 주변 모든 외국인에게 설.명.을 해야하니 가끔은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러게 왜 국제결혼은 해서 그렇게 떠돌며 살고 있냐고?

 

그러게 말이다만 같은 처지의 독일인인 내 남자도 미국인인 리즈도 체코인인 렌카도 프랑스인인 크리스토프도 이렇게 힘들까?

 

그렇게 떠돌면서도 내 이름에 집착하고 국적에 집착하고 끊임없이 한국을 변호하는 나역시 

 

하나도 다를 것없는 그 배양토를 먹고 자란 한.국.인

 

이런 나를 두고 인터넷에서 누군가 일본인이면 일본인이라고 솔직히 말하라던데 웃어야 하는걸까 울어야 하는 걸까

 

 

 

 

 

 

2006.12.12.Tokyo에서 사야

 

 

20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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