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맥주를 사가지고 내 자리를 찾아갔는데 앞에 이미 앉으신 분이 앞을 못 보시는 분이다. 앞을 못 보시는 거야 심부름을 시켜도 해드릴 수 있고 문제될게 없지만 내가 최대한 이쁘게 인사를 했는데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는 것. 거기다 표정도 그렇고 미동도 없다. 그럼 혹 들리시지도 않나 생각하시는 분이 있겠지만 그렇담 어찌 혼자 여행을 하겠는가. 거기다 외모는 딱 마피아같이 생기신데다 가부좌를 하고 앉은 폼은 딱 '도를 아시나요'다. 바로 코앞에서 내가 코트를 벗고 어쩌고 하는데도 그저 바람이 부는가 보다란 생각을 하시는지.
일단 맥주를 들고 로비칸에 왔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도대체 저 남자랑 오십센티밖에 차이가 안나는 침대를 사이에 두고 밤새 간다는걸 상상도 못하겠다. 그냥 삿포로에서 자고 개인실을 타고 올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도 들고 얘기했듯이 새벽 한시반인가 일어나 자지도 못해 피곤해 죽겠는데 술도 취하질 않는거다.
결국 맥주를 다 비우곤 다시 자리로 돌아와봤더니 이 아저씨 옆에다 맥주를 산처럼 쌓아놓고 그 자세로 드시고 계시는데 보통 사람들처럼 캔을 옆으로 구긴것도 아니고 위 아래로 납작 찌그러트린게 바닥에 이리 저리 뒹굴고 있다. 저기 있지요? 슬쩍 말을 걸어보는데 역시 미동도 없고 안들리는게 아니라는 걸 그가 켜놓은 휴대용 라디오소리에서도 알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다른 곳을 둘러보고 옮겨볼까도 생각했지만 좌석도 아니고 빈곳에 있다 누가오면 자기 침대인데 기분은 얼마나 나쁠 것인가. 용기를 내어 지나가는 승무원아저씨를 일단 불러 세웠는데 순간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바꿔달라는 것도 우스워 포기하고 말았다.
다시 식당칸으로 가서 역시 스파클링 와인을 시켜놓고 앉았는데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17시간 가까이를 로비칸에 앉아간다는 것도 암담하고 어찌나 우울하던지. 이 아저씨가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나를 공포스럽게 하는건 표정을 볼 수도 없고 목소리로 들을 수도 없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는것..
내 주변에 장애인이 몇 있어서 평소엔 그런 생각을 못해봤는데 보통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갖는다면 혹 이런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나는 참을성이 무진장 많은 사람인데 잘 못참는게 있다면 어색한 분위기나 숨막히는 분위기다. 어색한 분위기야 내가 주책이라도 떨어 풀면 되지만 숨막히는 분위기는 대책이 없다.
술을 다 마시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는데 그는 역시 나를 바라보는 같은 자세로 여전히 맥주를 마시고 있다. 가만히 앉아 그를 바라보다 다시 일어나 식당칸으로 가서 이번엔 적포도주를 시켰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나이가 몇 살인데 내가 너무 바보같다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든지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냥 쓰러져 자고 싶을만큼 피곤했지만 일단 세수를 하고 온 후 나 역시 그를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 기초화장품을 찍어바르면서 내 속에 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일본어를 뭐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들을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으니 이해하거나 말거나 영어로 말하기 시작. 역시 그는 어떤 표정의 움직임도 없이 술만 마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사실 무지 불편하다고 당신이 왜 내 인사를 안받고 그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일단 오늘 밤 같이 가야하고 난 피곤해서 자야겠는데 당신때문에 마음이 아주 안좋다고 그런데 어쩌겠냐고 당신이 나쁜 사람일거라곤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이 밤이 당신에게나 내게나 편안한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뭐 그런 이야기들을 줄줄히 풀다보니 지난 번 목아픈게 사라졌던 것처럼 갑자기 마음이 너무 편안해 지는 거다. 역시 뭔가를 마음에 담아두는 게 아니고 말을 해야한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깨달았다는 거 아닌가..^^
피곤했기도 했지만 어쨌든 푹 잘자고 일어났더니 전 날 밤의 일도 떠오르고 아침이란 생각에
안도감도 들고..마침 기차는 센다이를 향해가고 있었는데 여행출발할때부터 기대했던 해가 뜬다. 스칼렛이 옳았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거다..ㅎㅎ
늘 생각하는 거지만 해돋이는 정말 아름답다. 해질녁의 서글픔이 없어서일까 왠지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운좋게도 기차는 바닷가를 잠시 스쳐지나가고
바다 풍경은 너무 짧아 아쉬웠던..
그래도 강도 지나고..
드디어 끝나버렸다. 해뜨는 건 너무 순식간이란 아쉬움..
일어나서 씻고 문앞에 나가 담배도 여유있게 피우는데 지나가던 승무원아저씨. 내가 너무 여유있어 하니까 황당한지 쳐다보다가 여기서 담배피우면 안되는 걸 아느냐고 조심스레 묻더라..ㅎㅎ
그 사이 우리(?) 아저씨는 일어나셔서 역시나 같은 자세로 그 아침부터 또 맥주를 드시고 계시지만 이젠 세상이 바뀌었으니 내 알바 아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밤이 지나고 열차는 무사히 우에노역에 도착했고 내일 도착할 게생각에 역에서 백포도주를 사들고 집에 오니 오후 한시. 집에 가야겠다고 아바시리 호텔을 떠난 뒤 정확히 28시간만에(시댁에 가는데도 문앞에서 문앞까지 22시간밖에 안걸린다) 진짜 내 집 문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행이 좋은 건 돌아올 곳이 있기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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