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늑한 모래실

구월이 시작되었다.

史野 2013. 9. 2. 17:21

 

 

날씨탓이었을까 올 여름은 어찌 이 좋아하는 부레옥잠화도 몇 번 못 보고 지나간다.

 

벌써 일주일가까이 전기장판을 틀고 잔다.

물론 산으로 둘러쌓인 시골이란 특성도 있겠다만 새벽엔 정말 많이 춥다.

29도까지 올라갔던 실내온도도 며칠새 25도까지 떨어졌다.

오늘같은 날은 싸늘한게 대낮인데도 난로를 피우고 싶을 정도.

손님용으로 꺼내놓았던 선풍기도 이젠 들여놓아야할까보다.

 

결론은 벌써 체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춥다.

정국도 어수선하고 마음도 어수선하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만 삶이 더 막막해지는 기분이다.

여기서 혼자 십개월을 버텼다. 살았다기보단 온 힘을 다해 버텼다는 게 맞을거다.

놀러오는 사람들마다 하는 소리가 자기같으면 여기서 혼자는 죽어도 못산다,이니 대단한 일이긴 하다.

 

물론 소라님자매는 먹고사는 것만 보면 사야는 혼자살 자격이 충분하다더라.

이번에 친구도 자는 사야대신 아침에 해장국 끓이려구 간장찾다보니, 대식구 살림같다고 없는 게 없다며 무슨 혼자사는 사람이 이리 다 갖추고사냐고 놀래더라.

그것만 봐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게 느껴진다나.

 

그러게 그나마 자신을 사랑하니 이리 버티고 살지 아님 무슨 힘으로 이 하루하루를 버텨내겠냐고..ㅎㅎ

그래서인 지 사야는 무기력증에는 걸릴 지언 정 우울증에는 안 걸리나보다.

 

 

 

여기도 가끔 등장하던 상해살던 동생놈이 생활터전을 보라카이로 옮겼다.

친구놈이 몇일 전 요즘은 저가항공도 있고 비용 얼마 안든다며 겸사겸사 구월말쯤 보라카이에 같이 가잔다.

작년에 다른 친구랑 셋이 상해가자는 것도 끝까지 거절했는데 어쩌고 저쩌고 문자를 주고받다가 사야가 그러지말고 차라리 베니스를 가자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독일도 아니고 왜 난데없이 베니스를 가자고 했을까 스스로도 궁금하더라는거다. 

얼마전 이태리어를 쓰는 꿈을 꿔서 신기했던 적이 있는데 그거랑 연관이 있는 걸까.

예전부터 겨울의 베니스를 꼭 가보고 싶었는데 사야의 잠재의식이 그걸 기억하는 걸까.

 

상해손님들이 꼭 놀러오라고 했을때도 비행기타기 싫어서 못간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비행기탈 용기가 생긴걸까.

2007년 8월 22일에 돌아왔으니 비행기를 안탄 지도 이젠 육년. 그 해엔 지구도 한바퀴 돈데다가 반년만에 한국도 두번이나 왔다가고 여권에 찍힌 도장만 봐도 정신없었던 해. 

그동안 비행기를 안타도 되는 이 생활이 너무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 데 이젠 그 피로감에서 해방된 걸까 

 

이상하게도 사야는 베니스에 꼭 겨울에 가보고 싶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마 그해 겨울 혼자 베니스에 갔었을 거다.

독일에 갔다가 몇 일 시댁을 탈출(?)해서 혼자 프라하에 가고 혼자 리스본에 가고 그랬던 것 처럼 말이다.

 

아 생각난 김에 정말 올 겨울 베니스여행을 계획해볼까. 프랑크푸르트로 들어가서 기차타고 뮌헨 시누이집에 들렸다 다시 기차타고 베니스까지 내려가볼까.

그럼 너무나 막막한 이 다가올 겨울이 좀 견디기 쉬워지지 않을까.

유럽처럼 해가 빨리지고 우중충한 겨울에 오래된 건물사이를 무작정 걸어다니다보면 그러다 거리의 악사를 만나 음악을 듣고 있다보면, 그리고 추운 몸을 녹이러 어느 선술집에 들어가 술한잔 마시다보면, 적당한 취기에 포도주 한병 사들고 흐느적 흐느적 허름한 호텔방으로 돌아오다보면 사는 건 어차피 고독한 일이란 걸 피식 웃으며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아 안되겠구나 북쪽으로 시어머니와 전남편을 두고 성탄절달력이나 세야하는 그 계절에 그리 걸어다니다보면 진짜 우울해져서, 꿈속에서처럼 '나는 이태리어를 못해요' 를 유창하게 외치며 꽃꽂고 베니스를 유랑하는 여자가 될 지도 모르겠구나..ㅎㅎ

 

효력을 다한 여권속엔 여전히 달러 몇 장이 끼어져있는 데 사야는 다시 여권을 만들고 그 돈을 쓰는 날이 올까.

이러나 저러나 다시 비행기를 타볼 생각도 해보고 어딘가 가고 싶어졌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돌보지 않는데도 고맙게 쑥부쟁이 금계국 봉숭아 등등 끊임없이 피고지며 소박한 광경을 연출해주고 있다.

마당을 내팽겨치고 있는 지도 근 이주.

오늘은 정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또 쫓고 쫓기던데 저 곳에도 또 하얀 눈이 덮이고 소나무만 독야청청하는 날도 오겠지.

그때도 사야는 이 자리에서 밖을 내다보며 앉아있을까.

너무나 속이 시끄러운 날들이다.

 

 

 

 

 

 

 

 

2013.09.02. 여주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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