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노통의 사주기였다.
하루종일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도저히 사야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안그래도 외로워죽겠는 데 어젠 정말 미치도록 외롭다는 생각이 들더라.
노통의 사주기보다 어떤 분의 별세가 훨씬 비중있게 다뤄지는 이 세상.
윤창중파문, 사대강문제, 개성공단, 국정원 등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냥 가슴만 답답한 문제들이 그냥도 아니고 산재해 있는 이 상황에서 굵직한(?) 연예인들사태까지 터지며 수천만마리의 벌이 윙윙대듯 인터넷은 그저 윙윙대고만 있다.
거기다 이름도 무서운 살인진드기공포. 홍콩에서 눈하나 깜짝않고 그 대단한 사스도 버텨낸 사야다만 정식명칭 '작은소참진드기'인지가 정말 그렇게 무서운 존재라면 매일매일 풀밭에서 버티는 사야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이다.
곤충학자가 아니므로 여러 기사를 읽어봐도 잘 모르겠고 정확히 어떤 진드기인 지는 더 모르겠다만 진드기는 사야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아마 사야가 맨손으로 죽인 것만도 천마리 이상은 되지 않을까.
진드기기피제를 몸에 바르거나 목에 목걸이로 걸어주긴해도 이 환경에서 개들을 한번 풀어놨다하면 한 놈당 평균 이삼십 마리는 달고 나타난다.
이 진드기라는 게 개의 몸에 아예 몸을 박고 피를 빨아들이며 성장해 가더라. 그러니 일일히 떼서 죽이고 아직 자리 못잡은 작은 놈들은 손톱으로 잡아 제거해 줘야만 한다.
개털도 촘촘한 관계로 네 마리나 되는 놈들을 제거하다보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해도 남는 놈들이 있는 거고 울 새깽이들과 같이 자다보면 그런 놈들이 때론 침대를 기어다니기도 했더라지.
당시 검색을 해봤더니 개와 사람은 체온이 달라 개에게 붙는 진드기가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라기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다.
몇 년간 진드기떼는 일은 늘 새끼들을 한놈씩 쇼파위에 엎어놓고(?) 했고 그 쇼파위에서 자고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인 데 갑자기 살인진드기 공포 어쩌고 하니 많이 혼란스럽다.
사야 팔을 기어다니기도 했던, 사야가 경험한 진드기는 물고 달아나는 모기같은 존재가 아니라 상기했듯이 개들 몸에 몸을 박고 피를 팔아먹고 자라더라니까. 열심히 찾아도 놓치면 팥만큼 자라는 놈들도 가끔 있더라지.
온 산을 헤매고 다니던 울 새깽이들은 그럼 착한 진드기만 묻혀왔을까. 가장 왕성하다는 계절에 사야는 문밖출입도 자유롭던 울 호박이랑 한이불을 덮고 수도 없이 같이 잤는 데 사야는 그저 운이 좋았던 걸까.
예전에 사스때도 사야가 글을 올렸지만 사스보다 폐렴으로 죽은 환자들이 훨씬 많고 살인진드기보다는 말벌에 쏘여 죽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런데 이리 상황을 공포스럽게 몰아가다니. 심지어 사야같은 인간마저도 마당에 나설 때 이 설레발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는 데 이 심각성이 있더라.
진드기이야기가 길어졌다만 퍼센트지로 시골사는 사람중에 나름은 배운 사람에 속하는 사야도 갑자기 공포(?)를 느끼는 데 다른사람은 오죽할까, 하는 답답한 이야기다.
사야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혹독한 겨울만 버티면 이 찬란한 봄이건 여름이건 훨 수월해질 줄 알았는 데 아니다.
오피스텔을 포기한 이후 근 사개월 간 서울에 가본 건 조카 졸업식 이후 딱 한 번. 그것도 벌써 삼개월이다.
이런 저런 소소한 이유도 있다만 가장 중요한 건 그렇게 힘들게(?) 서울에 가 만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딴 생각하다 바라 본 밖의 풍경이 참 좋더라
그래, 이 긴 글 중 이제야 나오는 그 자업자득.
왜 사야는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걸까. 이 놈도 자르고 이 년도 자르고(물론 사야가 잘리기도 한다.^^;;) 가지치기 열나 하면서 왜 자꾸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걸까.
오늘은 역시나 전남편의 말이 생각나더라. 넌 왜 늘 대화가 의미있어야 한다 생각하느냐고 요리법 교환하고 남편 흉도 보면서 뭐 그렇게 슬렁슬렁 넘어가면 안되더냐던 그 말이.
승질 드럽고 까다롭고 면전에 대놓고 사람 무안하게 하는 말도 잘 하는 사야.
아마 사야말에 상처받은 인간도 저 진드기수는 아니겠지만 오대양육대주를 거쳐 꽤 많을 거다.
사십대는 그런 것 같다. 한해 한해가 다르다.
내가 뭘 못하고 뭘 인정해야하고를 매번 느끼며 받아들여하는 나이. 분노하는 데 뭣 때문에 분노하는 지는 아는 데 해결책이 찾아지지도 않을 뿐더러 지 몸하나 간수하기도 힘이 드는 나이.
부모도 없고, (없는 건 아니고 이틀 전에도 통화했다만) 남편도 없고, (남편은 아니지만 전 남친과 매일 통화하고 있긴 하다만) 자식도 없고, (이것도 개자식들이 넷이나 있긴 하다만) 이젠 친구마저도 없다.
경사모 삼인방중에 벌써 둘이랑 끝났고 그 남은 고기공놈마저 술을 마실 수 없는 관계로 지금은 아웃이다..ㅎㅎ
농담이 아니고 고기공놈이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사얀 그 놈을 만나러 서울도 몇 번 갔고 유산의 위험이 있지 않았다면 여주에도 오라고 했을거다.
참 그 경사모중의 하나인 짱가놈과도 결국은 통화를 했다. 안그래도 여기 올린 것만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는 데 통화하며 나름 잘 풀었다
사랑이란 건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다만 앞으로는 절대 사야 블로그도 안 보고 본인의 삶을 위해 노력하겠다니 다행이다.
그래 슬프게도 참 완벽하게 사야는 혼자다.
근데 백번 생각해도 자업자득이다. 이렇게 승질 드럽기도 어렵다니까..ㅎㅎ
십년 전 부터 어쩌면 사야는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외곬수로 늙어갈 지도 모른다는 어떤 직감이 있었는데 이게 현실화되었다
아이돌도 싫어하고 휴대폰도 안 바꾸고 지 잘났다고 생각하며 사는 이 마흔 후반의 애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신경쓰는, 이란 전제) 여자가 과연 이 삶을 잘 버텨낼 수 있는 걸까
무슨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멘트는 아니다만..과연..ㅎㅎ,
그래 과연 사야는 외곬수가 아닌 나름은 편견을 배제하며 늙어갈 수 있는 것일까
사야의 잣대로 세상을 재며 너희는 다르다가 아닌 틀렸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데 말이다.
그 증표로 사야는 여전히 노통이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믿지 않는 인간 중 하나다.
왜냐구?
세상엔 그런 인간이 있거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게 무지 자존심 상하는 그런 인간.
무지 힘들게 산 인간들은 의외로 직접 삶을 포기하진 않는다
그 삶이 죽기 보다 힘들기도 하지만 그 삶을 견녀 온 내 삶이 아까와서다.
그렇게 버리기엔 내 삶이 내 진정성이 아니 나의 신념이 나를 너무 배신한다.
결론은 또 제목과 다르다만
어쩌니
사야는 노통의 자살을 믿지않는다구
그게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궤변 비슷할 수는 있다만
이렇게 외로와도 사야는 혼자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야랑 노통을 비교하는 건 우습다만 힘들게 살아 죽는 게 의외로 얼마나 쉬운 지 아는 인간들은
쉽게 죽지 않는 다는 이야기다.
아니 거꾸로 내가 얼마나 이 삶을 힘들게 살아왔는 데 미쳤냐 죽게?
그래 사야는 그렇다
두 곳 정도 노통 주기를 쓴 블에 가서도 같은 이야길 달고 왔는 데
사야가 노통의 죽음을 인정 못한다는 이야긴 그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인정 못한 단 이야기가 아니라
사야는 여전히 노통의 자살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사야같은 애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사야랑 비교 불가 멘탈 갑인 사람이 기껏 와이프가 받았다는 명품시계나 의혹으로 바위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을 사얀 여전히 인정 못한 다는 이야기다.
그래 그거였다
사야가 노통이 죽었다는 걸 사 년이 되도록 인정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자살했다는 것 그걸 인정 못하고 있는 거다.
사야야말로 백 번 자살했어야 하는 사람인 데도 여전히 살아있는 데 말이다.
2013.05.24. 여주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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