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늑한 모래실

감정소비가 많은 날들

史野 2013. 5. 3. 16:04

그가 다녀갔다.

사야가 좋아한다는 남자.

느닷없이 연락하고 또 바람처럼 사라지는 남자.

지난 번엔 이주만에 만났었는데 이번엔 한달 반만에 만났다.

 

어쨌든 그가 통화를 하다 자발적으로 사야네 집에 왔다는 건 획기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통화를 하면 오래된 친구같고 그러다만나면 이십대의 연인같았다가 아침엔 십년 쯤 함께 산 부부 분위기고 또 원나잇스탠드를 한 사람들처럼 아무 기약없이 헤어지는 종잡을 수 없는 관계다

소유할 수 없는데 충만함을 주는 남자, 이 나이가 되도록 수도없이 연애를 했다만 이런 관계는 처음이다.

모든 세포가 일어나 각자의 존재를 알리는 느낌.

그의 집에 다녀올 땐 기분이 이렇지 않았는데 어젠 그가 떠나고 스산한 날씨에 소낙비까지 쏟아지니 맘이 복잡한게 아무것도 손에 안잡히더라.

 

마침 고기공놈이 전화를 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는 놈.

결혼식에서 보고 못봤으니 그 놈과 만난 지도 삼개월이 훨 넘었다.

그 놈이 결혼을 한 것도 그렇지만 천안으로 이사를 가버리니 사실 만나는 게 쉽지가 않다. 결론은 비어플러스를 가본 지도 그렇게 되었다는 거네

둘다 서울이었다면 당장 만났을텐데 우리는 통화할때마다 외국에 산다고 생각하자고 웃는다만 어젠 정말 보고싶더라.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한 날이었는데 우연히도 충주 상가집 다녀가는 길이라며 저녁에 무소카놈이 나타났다.

아시다시피 무소카놈은 고기공놈보다 더 오래된 인연.

전남편이랑도 친했고 사야의 이십년 세월을 지켜봐준 역시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는 사야의 몇 안되는 지인.

누나 지금 갈테니 커피한잔 줘요, 하는데 마침 오후에 배달된 따끈따끈한 원두가 있어 어찌나 다행이던 지.

무소카놈도 대단한 커피광인지라 결론은 갓볶은 커피를 줬다고 구박받았다만.

 

사실 사야인생이야 늘 새로운 시도의 연속이었다만 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지금 어찌보면 그들이 가장 필요할 때인데 고기공놈도 그렇지만 이 놈도 너무나 바쁘다.

전화하면 여수다 울산이다. 지난 번엔 심지어 스위스라더라. 그때도 한달이나 있다왔는데 조만간 이번엔 중국에 한달정도 가 있을지도 모른다네. 

사실 이 근처를 수도없이 지나다닌다는데 일끝나고 올라가다보면 새벽 두시 뭐 이런 관계로 들릴 수가 없었단다.

작년 여름에 보고 처음 보는 거니 얼마만인 지, 오늘 출근을 해야하니 세시간 정도밖에 이야길 나눌 순 없었지만 사야에겐 단비같았던 시간. 절대 흥분하는 법이 없고 예리한 견해를 내놓는 관계로 사야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놈이다.

 

그 남자도 무소카놈도 사십대의 미혼들인데 외롭지가 않다는, 사야로선 신기하기 그지없는 멘탈 갑인 사람들. 그 남자는 결혼할 생각이 아예없고 무소카놈은 꾸준히 연애를 하는 걸 보면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어제도 결혼 그거 꼭 해야하냐고, 무심하게 묻더라.

남친이나 친구놈을 보다 이 두 남자들을 보면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같다.

그러고보니 둘은 이혼했고 둘은 미혼이니 그 차이인가? 아님 나이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운동을 좋아하고 아니고의 차이인가? 

물론 저 네 사람은 사야가 다 친하다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긴 하다만.

 

무소카놈 누나 차 어쨌냐고 이 시골에 반년이나 차없이 살고 있다는데 너무 놀래더라. 뭐 먹고사냐고 그 밤중에 자기차로 뭐 사러나가야하는 거 아니냐는데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그래 지금 사야에게 절실한 건 함께 살 남자나 반려동물이 아니라 차일 수도 있다.

문제는 차가 있어야 이 생활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건 지 아님 이 생활을 잘 견뎌낼 자신이 생긴 후에 차를 사야하는 건지를 잘 모르겠다.

확실한건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뿐 아니라 사야가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사람을 만나야한다는 것. 이렇게 사람을 피하고 혼자 오래 버티는 건 바람직한 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야가 누리는 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저 멘탈갑인 사람들과는 달리 오래 유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생각해보니 재밌게도 지금 사야에게 힘이되는 사람들이 무소카놈은 뒤셀도르프어학원, 고기공놈은 더블린어학원 친구놈은 상해어학원 다 어학원인연들이다. 도쿄에서도 어학원을 다녔다면 귀한 인연이 하나 더 생겼을까?

떠도는 인생에서 인연하나씩을 건졌으니 헛 산건 아닌가보다. 리즈나 마유미 자비네, 연락은 끊겼어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들도 있고, 떠돌았기에 가능한 일이니 떠돌이 삶에 감사해야하는 건 지도 모르겠다. 

 

춥다. 날씨도 춥고 마음도 춥다.

역시나 오늘도 바람이 차게불고 구름이 가득한게 스산한 날씨다.

어제 무소카놈이랑 이야길 해서인가 갑자기 전남편이 많이 보고싶다. 요즘 사야가 고민하는 이런 저런 일들이나 국정원댓글사건이나 행복기금같은 황당한 일에 대해 여섯시간이고 일곱시간이고 아니 속이 다 풀릴때까지 이야길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사얀 전남편처럼 말 잘통하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와 토론을 하고 검증을 할때 사얀 늘 자신이 있었는데 이젠 사야의 생각에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어제도 무소카놈에게 확인받고 또 확인받고..

정부도 믿을 수 없고 법도 믿을 수 없고 먹거리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게 믿을만한 사람이란 건 꼭 대한민국의 문제만은 아니겠다만 사는 게 고단하다. 그리고 잘 산다는 건 더 고단하고 힘이 든다.

 

사람들을 만났더니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더 그립다.

그들을 찾아 도시로 나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적응력이라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사야가 설마 아파트에서 버텨내지 못할까.

휴대폰을 안바꾸고 있는 것도 일종의 고집인 것처럼 이 집을 지키겠다는 것도 그런 류의 고집은 아닐까.

어지럽다.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다고 말로만 떠드는 사야는 실제로 헛똑똑이에 나이브한 거라면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사야는 어떻게 이 고단하고 어지러운 삶속에서 의연해질 수 있는 걸까

 

 

 

 

 

 

2013.05.03. 여주에서....사야 

  

 

 

'4. 아늑한 모래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자 산다는 것 3  (0) 2013.05.08
아 정말 어렵다, 이 삶이.  (0) 2013.05.06
오월의 첫 날  (0) 2013.05.01
혼자 산다는 것 2  (0) 2013.04.30
추위에 지친 사야  (0) 201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