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사랑하는 너에게

史野 2012. 12. 17. 19:26

이제야 편안한 맘으로 편지를 쓴다

너희가 연애를 시작한 지 다음 주면 일 년, 교제를 반대한 것도 일 년 근데 결혼을 한달 앞 둔 이 시점에서 말이야.^^;;

 

네가 알다시피 언니는 유감스럽게도 이유없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지.

언니도 스스로 이유없이 화를 낼 수 있기를 조금은 덜 예민하길 아니 조금 덜 똑똑했길 그것도 아님 기억력이 남들보다 좀 떨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산 적이 있단다.

 

너를 처음 만났던 십사년하고도 반이나 되는 그날, 더블린 카페테리아에서의 네 모습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너때문에 제리를 알게되고 네 스무살 파티를 우리집에서 하고 육개월도 안되는 그 시간동안 너와 내가 헤집고 다녔던 더블린의 팝은 얼마며 그 수많은 사연들은 또 얼마인 지.

 

만으로 서른하나의, 지금의 너보다 어렸던 사야가 그때 어떤 모습이었는 지 너는 고스란히 내 삶의 증인이지 (하긴 넌 기억력이 나빠서 언니가 말해주기전에 모른다만..ㅎㅎ) 

IFC바의 그 맛있는 치킨윙스, 수사님과의 그 길고도 지루했던 토론인 지 싸움인 지 그 밤, 너무나 멋진 연주가 있었던 그 지하 재즈바, 결국은 네가 가방을 잃어버렸지만 언니가 술만 마시면 미친듯이 춤을 추곤했던 그래프튼스트릿 모서리의 그 멕시코음식점.

그리고 이젠 지명마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너를 아주 오래 기다리게했던 그 모퉁이의 파란색의 팝까지.

네가 아빠를 위해 소방서 자료를 얻겠다고 찾아가다 만났던 터드(!) 브릿지, 그 식당배급문 사이로 우리 둘을 위해 멋지게 아리아를 부르던 그 소방관아저씨도 생각나니?

 

학교를 계속 다녀야겠다는 핑계로 언니가 알비아저씨를 버리고 독일로 도망가버린 것도 그 때였지. 그래 고기공이란 특별한 별명을 지어준 것도 알비아저씨였지.

독일로 찾아온 너와 언니의 뒤셀도르프를 쏘다니고 맥주마시다 언니인생 최초의 방송인터뷰를 한 것도 너와 함께였지

에센의 그 집 그리고 동유럽으로 떠나던 너를 배웅하던 역에서의 언니.

 

갑자기 한국에 가겠다고 난리였던 울 시누이를 경주여행까지 동행하며 케어해준 것도 너였고

살이 쭉 빠진 너를 종로에서 만나 알비아저씨랑 셋이 춘천닭갈비를 먹고 상해로 온 너랑 또 신천지며 진마오며 쏘다녔었지.

넌 도쿄도 두번이나 다녀갔다.

 

언니가 한국에 돌아와 했던 첫 여행에서도 너는 내 동반자였고 언니가 태어나서 처음 혼자 운전하는 건데도 겁도없이 장성까지 그리고 그 험한 내장산 산길을 함께 넘어준 것도 너였다.

전화만 하면 늘 안양부터 답십리까지 무슨 일이냐며 튀어와준 것도 너였다.

 

미안하다

넌 늘 무조건 언닐 믿어주고 응원해줬는데 언니는 그렇게 해주지 못해서..

여주가 무슨 이역만리라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병문안 한번 가주질 못해서..

그리고 네게 필요한 게 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맘편히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나이어린 애들에게 늘 잘해주면서 원래 인생은 그런거라고 나도 그렇게 받았으니 앞으로 만나는 어린 애들에게 내 생각하면서 잘해주라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렇게 하나하나 짚어보다보니 거꾸로 언니가 네게 받은 게 참 많다.

생각해보니 언니 이혼할 때도 달려와 통역을 해주고 함께 울어준 게 너네.

 

1월 20일

결혼식에는 간다고 약속했으니 가는 게 아니라 너희를 축복하러 기쁜 마음으로 가마

그동안 언니에게 서운했었던거 있으면 다 풀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이제 네 남자도 사랑하마

너무 사랑해서 너무 아껴서 그랬다고 그냥 이해해주렴. 물론 언니는 언니가 그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아집과 독선으로 그랬겠지만 말이야.

너니까 가능했겠지만 언니의 그 모진 독설들을 잘 참아내줘서도 너무 고맙다.

 

얌마

근데 너 언니 잘 알지? 앞으론 언니의 이 차고 넘치는 긍정에너지로 팍팍 밀어주련다

그간의 맘고생은 다 접고 새출발하자

정말 너와 내가 함께 나눈 세월, 구구절절히 문자로 다 남기고 싶지만 그만 참기로하고..

 

사랑한다 이 놈아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길 간절히 바란다.

이젠 앞으로 너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버팀목이 되어 줄 이 언니가 옆에 있을 거잖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언니가 말이야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2012. 12. 17. 여주에서...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