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스님도 이런 비슷한 이야길 올리셨던데 전에도 올렸던 것 같지만 나도 좀 써봐야겠다.
내가 인터넷을 한 건 꽤 되었지만 한글윈도우가 아니었던 관계로 한국사이트는 못 들어오다가 드디어 한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있게된 건 더블린마지막해 그러니까 2000년 2월 22일.
그날 그게 너무 신기해서 여기저기 마구 들러보다가 다음카페를 발견했는데 거기 마침 육십년대생을 모집하는카페가 있더라는 거다.
그래 잽싸게 가입을 했다. 재밌었던건 그 날이 카페개설일이었는데 그날 수십명이 들어와서는 그 사람들이 몇년이나 카페를 지킨 말하자면 텃세부려서 남들 발도 잘 못붙이게한 그런 카페..ㅎㅎ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안들어오는 네 다섯정도 명맥만 유지되는 카페지만 어쨌든 내겐 내가 최초로 넷의 세계에서 교류한 사람들이다.
내 대학로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오시던 나무님 그리고 여기 가시님이 다 그날 같이 가입했던 사람들.
카페죽순이로 유명했던 나도 잘 안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몇년만에 나타나도 반가와하는 그런 분위기.
사실 그 세월이면 우리가 넷에서 알았는 지 아닌 지도 까먹을만한 세월이다.
그녀도 그 날 멤버다. 우리 카페를 떠났는가 싶을만큼 잘 들어오지도 않는 그녀가(그래서 내가 한국에 나온 지도 몰랐단다) 어제 변산반도에서 워크샵이 있었다며 우리 집에 왔다.
얼굴본 건 2001년 여름이 마지막이었고 좀 전에 확인해보니 메일이 왔던 것도 2005년이 마지막이더라. 그런 그녀를 7년도 넘어 만났는데 그리고 자주 연락했던 것도 아닌데 정말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어찌나 반갑고 편안하던지..
저녁을 먹고 눈치빠른 남친이 조금 이야기를 하다 자리를 피해준 이후 우리 두 사람은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시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삼십대초반에 만났던 우리들은 그 사이 사십대로 들어섰고 정읍출신에 전주에서 일하던 그녀는 이제 서울로 나는 장성으로 내려와있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는 도대체 내가 왜 백양사에 있는 지 상상을 못해서 아마 도닦으러 들어갔는 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나..ㅎㅎ
나름 멋쟁이(?)였던 사야가 살은 엄청 찌고 후줄그레한 차림으로 앉아있는데 그녀가 그런다, 언니 참 편안하고 행복해보여요.
그리고 이 남자랑 잘 맞는 것 같단다. 역시 맨날 후줄그레한 차림의 이 남자 오늘 후배결혼식(그때 고기공놈 파티에 왔던 그 친구)이 있어서 오랫만에 나름 차려입었다.
남친은 이 사진이 맘에 안든다고 올리지말라지만 내가 언제 그런 말 들어주는 사람이더냐...ㅎㅎㅎ
그리고 오늘 가시님이 우리카페에선 파랑님이 우리가 여기 모여있단 소식에 남편분과 와계신 손님분까지 모시고 나타났다.
남편분이 마을 이장이시라 우리가 맨날 이장님사모님이라고 하는데 결혼식간 남친에게 이장님오셨다고 전화했더니 옆에서 '내외분'이 오셨다고 하란다..ㅎㅎ
강진이 멀진 않지만 아직 가보질 못해서 남편분은 처음 뵙는데 오랫만에 만난 우리 셋이(셋이 만난건 팔년전이니까) 수다떨며 집이 떠나가도록 웃어대는 동안 저 옆의 두분 우리는 도대체 여기 왜 온거냐고...^^;;;;
나중에 남친이 나타나서야 식탁에 합류하셨는데 재밌으시다. 남친에게 이장되는 법도 알려주셨다지...하하하
남친도 이야기하드만 맨날 골치아픈(?)글만 올리셨던 가시님 얼굴이 엄청 편안해지셨더라. 이장님 말씀이 다음 이장후보라나.
백양사까지 단풍구경도 못가고 그저 부엌에 앉아 수다에 수다들을 떨다보니 어느 새 저녁.
인터넷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
그 만남이 이제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 되어간다.
사실 맨날 웹에서 만나 서로 간이라도 빼줄것처럼 난리를 치다가 연락이 끊기면 그만이기도 한 인터넷인연인데 꼭 오랜 동창들을 몇년만에 만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니 반갑고 또 고맙다.
외국을 떠돌때 내게 웹은 절대적이었고 외롭고 힘든 내 인생에서 큰 버팀목이었는데 돌아와서도 참 많은 넷인연들에게 위로를 받고 산다.
난 솔직히 외국에살땐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왜 인터넷에 목매는 지 이해를 못했었다. 당시 내 생각으론 한국엔 널린게 사람인데, 그 사람만나기도 바쁜 마당에 왜 인터넷앞에 앉아있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인터넷앞에 앉고 여전히 많은 위로를 받으니.
아니 위로만 받는 게 아니라 좋은 음악이라며 음악도 보내주고 커피콩도 보내주고 심지어 포도주까지 보낸다고 주소부르라고 하고 벽에 걸라고 직접 만든 작품도 보내준다.
지금도 왜그랬는 지 이해못하지만 도쿄살땐 내게 배도 아니고 비행기로 잡곡을 보낸사람도 있었다..^^;;;;
우짜든둥 사야는 이 인터넷 공간이 참 좋다.
어제오늘 최초로 한국인터넷에 접속해서 만났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영어쓰고 중국어쓰고 살다보니 가장 절박했던 독일어랑 멀어져 공부할겸 상해에서 처음 시작했던 '미워할 수 없는 독일어' 그리고 홍콩가서 개설했던 '사야의 물감묻은 궁시렁' 그러다 그냥 지인들에게 전하는 소식지로 쓰겠다고 지금 '사야의 낯선 사랑방'으로 오기까지.
그러면서 말한마디라도 섞었던 사람들이 내가 떠돌며 만났던 사람들만큼 되는 것 같다.
만났건 만나지 못했건 내게 상처를 줬건 아니건을 떠나 다 모두 너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떠돌때도 그랬지만 돌아와 여기 이렇게 자리를 잡기까지 읽어주고 공감해주고 용기를 주는 당신들이 없었다면 나는 까미유 끌로델처럼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는 사람.
초등학생의 일기처럼 앞으로도 그 고마움을 알고 잘 살아내겠다고
내가 노력했고 당신들이 믿어줬던 것처럼 나를 속이고 척하는 삶은 살지 않겠다고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잘 늙어가겠다고
그런 다짐을 하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다.
2008.11.08. 장성에서...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