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날 드디어 짐이 도착했다.
겨우 저 트럭 한대분의 분량인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치러야했다니..
그나마 떠나기전 책들을 확 정리해버려 다행이지 한번 읽고 안 읽을 소설책들을 가져오느라 수백만원을 더 냈어야했다면 피눈물날뻔 했다.
부탁한대로 남편은 책과 옷과 씨디들 그리고 그 외 첼로와 골프채 그림들을 보냈다.
문제라면 왠수땡이 남자가 내 책들을 다 보내지 않았다는 것. 미술사관련책들을 빼곤 독일어책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공부할때 죽을똥살똥 모아놓은 자료들도 당근 하나도 오지 않았다.
여기선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도 아니지만 내겐 아이가 처음 말한마디를 배우듯 내 15년 독일어역사가 있는 책들인데
책이 가득한 집에서 자란 남편이 온집안 책이 한꺼번에 빠지는걸 못견뎌 남긴 마음은 이해한다만 어찌나 서운하던지..
화를 내는 내게, 남편은 그리 쉽게 떠나놓고 책에는 왜그리 집착하는거냐고 되려 서운해하던 남자..-_-
독일어책이 꽂혀야할 곳엔 대신 남친과 내 씨디가 자리를 잡았다.
우짜든둥 대충 정리를 했더니 이 상태다. 책넣을 걱정없이 빈칸도 마구있는 책장은 내 생애처음이라 완전 뿌듯.
앞으론 놀 곳이 없어 책을 못사는 일은 없겠지..^^
책도 주인팔자를 닮는 법. 지난 번에 꽤 정리를 해서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나와함께 한국을 떠나 독일로 아일랜드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떠돌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책들도 좀 있고 한국에서 태어나 비행기로 일본까지 가셨다 이번에 다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온 책들도 있다.
아니 미국에서 출간되어 한국에 왔다가 온 세계를 다 떠돌고 다시 한국으로 온책들도 몇 권있다..-_-;;;
독일로 돌아가게 되면 배송비걱정에 책 못살까봐 읽지도 못하고 사모은 책들도 있으니 억울하기 이를데없지만 말이다.
책을 구입하는데 든 돈이 천만원이라면 유지하고 끌고다니는데 든 돈은 사오천될거다. 그래도 꼭껴앉고 다녀야만 했으니 어찌 저책들이 내게 그냥 책이기만 하겠는가.
시어머니에게 저 자리에 앉아 차를 따르는 그 사진을 보냈더랬다. 사진이 너무 낯설었다는 그녀에게 한국전통식으로 차를 마시는거라 그런거라니 아니란다. 빈책장앞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너무 낯설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나.
그녀다운 관찰력이다. 거기다 그녀는 독일책이 안온다는 말에 크리스마스에 자기라도 독일책을 보낼테니 원하는 제목을 보내달라는데 가슴이 뭉클.
예전에 그녀와 전화로 책이야기로 수다를 떨면 '너희들은 그 비싼국제전화로 그딴이야기까지 하냐고 그냥 안부만 묻고 그런 이야긴 만나서 하라'고 옆에서 시아버지가 구박하셨더랬는데...ㅎㅎ
아무리 우리가 좋은 친구라도 그녀는 시어머니인데 남친이 내게 잘하는 지, 우리식구들은 좀 나아졌는 지 우리 엄마야 어차피 비교대상도 아니지만 다른 어떤 친정엄마보다 더 살뜰이 챙기고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더 간절히 내 행복을 바란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너는 참 멋진 인간이라고 그걸 네가 알고 네 건강을 더 신경써주었으면 좋겠다, 고 말한다.
무엇보다 남친과 24시간 붙어있는 게 가장 좋다니 그 마음 알것같다는 그녀..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그저 자기가족이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못해 힘들어하던 그녀였는데 이젠 그 고비도 넘긴 듯하다.
다른 건 괜찮은데 무서운 속도로 몸무게가 늘고 있다니 가까운 곳에 너를 도와줄 의사가 없냐고 말해 나를 웃기기도 하는 그녀.
하긴 내가 예전에 우울증으로 이십킬로 넘게 불었던 때를 아는 그녀니까 그녀는 농담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만.
그녀나이 만으로 일흔하고도 여섯. 삼십오년이 흐르면 나도 그녀처럼 그런 모습일 수 있을까.
그녀와 내가 자란 환경이 다르니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녀처럼은 될 수 없을테지만 닮을 수 있다면 닮고 싶다.
어쨌든 책이 오니 진짜 이 곳이 내 집같다.
그날 이래저래 기분도 그렇고해서 술왕창 마시고 또 남친에게 주정을 했다.
이번엔 '나 갈거야 떠날거야'가 아니라 '나 이젠 여기서 절대 못떠나 그러니까 당신이 잘해야해'..^^;;;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된 줄 알았는데 내일부터 창고수리를 해주신단다. 시작할 엄두가 안나 훗날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담양에 계신 스님이 책임지고 해주시기로 했고 어머님과 큰스님의 결제도 받았다.
아무리 엉터리로 지어놓은 집이라지만 대충 수리하는데만도 육개월이 걸리나보다.
전문가의 손을 빌리는 게 아니라서 내 마음에 꼭 들게 수리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대만땅이다.
창고가 완성되고 겨울이 오면 굴속의 다람쥐처럼 틀어박혀 책이나 읽을 생각.
드디어 별채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었다. 담양장에서 사온 고구마속에 내가 캔 고구마도 슬쩍 끼워넣었다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일텐데 맛있기까지 했다.
내 평생에 내가 키운 고구마를 구워먹는 일이 생길줄이야. 하긴 뭐 요즘은 콩나물도 길러먹는다만..ㅎㅎ
그래 사야는 이제 완벽하게 장성댁이다.
2008.11.02. 장성에서...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