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미국에서 온 뜻밖의 전화.

史野 2005. 2. 16. 10:36

 

오랫만에 기분좋게 비 내리는 아침.

 

남편이 출근한 후 뉴스를 보며 아침을 준비해 먹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아침엔 왠만해서 전화가 울리지 않는 우리 집. 혹 남편이 뭐라도 잊고 갔나 전화를 받았더니.

 

거기 000씨댁이죠?

아 선생님!

이 놈아 목소리는 안 잊어버렸구나.. 잘 지내니?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

 

어떻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그 분은 미인에 멋쟁이기도 하셨던 중학교 일학년때 담임선생님이다.

그러니 그 분과 내가 처음 만났던게 벌써 25년전이다.

 

살면서 우리는 가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데 이 선생님은 내게 그런 분이다.

그 어린 나이의 나를 늘 너는 크게 될 놈이라며 믿고 밀어주신 분.

 

학력고사가 끝났을때도 고3담임선생님보다 먼저 전화를 하셔서 점수를 물어보신 분.

높은 점수에도 불구하고 형편상 선생님이 되는 길을 선택하던 나를 너는 더 큰 일을 해야하는 놈이라며 안타까와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그나마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었는지.

 

다니던 대학에 영 적응을 못하고 결국 휴학을 했을때도 데모하다가 짤린게 아니냐고 걱정하시던 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껏 내 앞가림하나 못해 헤매던 나의 당시 민망함이란..

 

이 놈아 니가 얼마나 멋진 놈인지 아느냐는 선생님의 말씀은 살면서 절망스럽고 힘들때마다 숨겨놓은 부적이라도 되듯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더 큰 인물은 커녕 당신처럼 멋진 선생님도 되지 못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이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는 유감스럽게도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만 그래도 단순한 난 선생님의 믿음이 좋다..^^ (가끔은 정말 뭘믿고 아직도 저러시나 하는 생각이 안드는 건 아니지만.-_-;; )

 

 

선생님은 우리가 대학신입생이 되었을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지금은 역시 미국으로 이민간 친구랑 공항에 나갔었는데 떠나시며 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속에 선명하다.

 

아일랜드에 살때까지만 해도 스승의 날이 되면 꼬박 꼬박 전화를 드렸었다.

선생님 스승의 날이라 전화했어요 하면 야 내가 무슨 스승이냐 쑥쓰럽다고 하시면서도 좋아하셨는데 아시아로 오고부터는 어떻게된게 영 마음의 여유가 생기질 않아 챙기질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친정집 전화번호가 그대로라 상해에서도 홍콩에서도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동경가면 바로 연락드리겠다고 하곤 여태 연락을 못 드렸더니 또 서울친정에 전화번호를 물어 동경으로 전화하신거다..-_-;; (맞다 얼마전에 연락드려야하는데 했던 분이 바로 이분이다.)

 

죄송한 마음과 함께 눈물나도록 고마운 이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손주가 벌써 셋이라고 내일모레면 육십이니 이제 할머니 아니냐는 말씀에 아무리 상상을 해볼려고 해도 선생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나만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가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왠지 선생님은 여전히 그 모습으로 계셔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5년전에 한국에 갔을때 우연히 한국에 오신 선생님을 뵌게 마지막이었지만 그때도 선생님은 여전히 젊으시고 멋쟁이셨는데..

 

 

나이에 맞는 괜찮은 모습이고 싶어 안그래도 요즘 엄청 고민하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늘 그러시듯 희망적인 말과 방향설정을 해주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역시나 가끔 전화하는 끈질긴 제자 한 놈이 작년 스승의 날 전화해서는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아니냐고해 웃었는데 정말 그런가보다.

 

물론 난 스승도 제자도 잘 못챙기는 부끄러운 모습이지만..-_-;;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나니 왠지 정말 잘해낼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마구 드는 행복한 아침

정말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새삼하는 아침.

 

이 글은 물론 흥분한 사야가 자랑하고 싶어 올리는거다..ㅎㅎ
 

 

 


 

2005.02.16 東京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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