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교사라는 말은 있어도 일일학부형이란 말 들어보았는가?
오늘 내가 일일학부형을 하고 왔다. 한국에 돌아오니 별 일을 다한다..ㅎㅎ
오늘은 둘째 조카놈이 논술시험을 보는 날인데 또 첫째 놈이 자대복귀를 하는 날(벌써 구박십일이 가버렸다..ㅜㅜ)이기도 하다. 오빠네 부부는 큰 놈을 맡기로 하고 내가 둘째 조카놈을 맡기로 합의를 봤다. 논술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군인이 우선..^^
나야 군인인 적은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입대하던 것보다 첫 정기휴가 복귀가 더 힘들것 같아 안쓰럽더라. 나같은 인간은 정말 군생각만 하면 여자로 태어난게 감사하다못해 조상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다..-_-
어쨌든 내일은 또 면접을 본다고 해서 오전에 예비소집도 가야해 운동도 못하고 아침부터 서둘러 나갔다.
거기서 조카친구놈을 만났는데 그 어머니 아주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아니 왜 어머님이 안오시고 고모가? 다른 아줌마들도 저 이상한 여자는 새엄마도 아니고 뭐냐 분위기..ㅎㅎ
원래는 점심만 먹여 시험장 들여보내고 올 생각이었는데 부대에 다녀오는 오빠네가 늦어질 것 같아 기다렸다 저녁까지 먹이기로 했다.
세시간이나 걸린다니 나는 신림동이나 봉천동쪽으로 사진을 찍으러 갈 예정이었는데 막상 조카가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왜 내가 다 떨리던지 그냥 마음을 모아 기다리기로 결정.
다행히 날씨는 좋아 역시 내 로망이기도 했던 캠퍼스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일던 소설책을 마저 읽는데 묘한 기분.
나야 입시에 별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지만 나와 기다리고 있는 아줌마들의 심각한 수다를 듣다보니 그래 대학을 가는 일이 참 대단한 일이지 싶더라.
우연히도 조카놈이 두 놈이나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수시로 지원했는데 재밌는게 작은 언니딸은 전교일등이다보니 지역균형수시 오빠아들은 외고라 특기자전형 수시다. 지역균형도 어차피 성적좋은 애들이고 조카놈도 성적우수 특기자라던데 나야 뭐가 다른 지 모르겠다.
어쨋든 전자는 면접만 보고 후자는 논술도 본다고 해서 조카딸은 다 늦게 수험표만 받으러 나타났다. 언니딸은 아예 다른 대학은 치지도 않았다고 하고 조카놈은 고대수시도 냈는데 학교에서 시험을 보러가지 말라고 했다나.
그러니까 무슨 과건 서울대만 무조건 가라는 이야기니 왕 황당. 담임이 말리는데도 올해 대학을 가야하니 꼭 보겠다는 조카놈 역시 맘대로 했다.
조카놈왈, 자긴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는다면 대학을 안가겠단다. 내 조카만세..ㅎㅎ
시험이 오후 두시라 시간이야 충분해서 한참을 걸어나가 점심을 먹고 또 천천히 걸어와 차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 놈이 언제 이렇게 커버린건가 싶은 마음.
이 놈은 어려서 나를 정말 너무나 좋아해서 우리 둘의 구구절절한 사연도 많다..^^
나야 소설책이라도 읽고 있었지만 바깥에 앉아 꼼짝도 안하고 기다리는 엄마, 삼삼오오 수다떠는 엄마 혹은 아빠까지 나타난 집들, 정말 학부형이라는 거 쉬운 일이 아니더라. (난 하루로 충분하다..^^;;;)
수시함께 보는 친구랑 같이 왔었다며 다섯시에 맞춰 나타난 놈과 세 시간동안 논술을 본 놈, 셋이 수다를 떨며 걸어나오는데 어른 둘에 수험생 하나는 있어도 나처럼 수험생을 둘이나 끌고 가는 젊은(?) 여자는 없으니 어깨 으쓱..ㅎㅎ
맛있는 걸 사준다고 일식집에 들어가 두 놈을 앉혀놓고 맛있게 먹는 걸 바라보니 안먹어도 배부르다.
오빠 아들이 한 살 어린데 함께 다니게 되면 말을 놓느니 어쩌느니 둘이 재잘거리는 걸 보니 귀엽기도 하고 내 조카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너무나 잘들 자라서(공부만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렇게 독립적인 한 인간이 되어가는 거구나, 부모들이 큰 일했다 싶은 기분.
둘다 내일 일찍부터 면접이라던데 정시가 있긴 해도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집에서 특별 과외같은 걸 시킨 것도 아니고 두 놈 다 지들이 알아서 그렇게들 공부를 잘해준 것도 고마우니 그 상으로라도 말이다.
물론 내가 다니고 싶었던 대학이었으니 그 놈들이라도 다녀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마음도 숨기진 않겠다..ㅎㅎ
내일 면접 볼 놈들을 앉혀놓고는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짝을 만나는 일이니 대학에 가서 연애를 열심히 하라는 일장 연설을 한 고모이자 이모지만 (오늘 일식집 아줌마 이모냐 고모냐 하길래 이모이자 고모예요 그랬다..^^) 무엇보다 조카들이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당시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 나이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야 없다만 그래도 앞날이 창창한 두 놈을 보니 그 놈들이 겪어내야할 파닥파닥한 인생이 부러운 맘도 들더라.
나야 모든 인생이 각자 겪어내야할 몫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시행착오를 덜 할 수 있도록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도..
얘들아
오늘 푹자고 내일 면접 잘 치르렴
그리곤 모든 걸 잊고 미친척 개판도 치고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며 그 시간을 즐겨라.
어찌보면 진짜(?) 인생은 내일부터 시작이니까..
2007.11.29.서울에서..사야
승호야
아줌마가 오늘 안해보던 일을 하느라 너무 긴장해서 카메라를 꺼낼 생각을 못했다. 사진없다고 투정하기 없기.
그리고 이제 오늘 아줌마가 무슨 일을 했는 지 믿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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