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망 좋은 방

일일 학부형

史野 2007. 11. 29. 21:42

일일교사라는 말은 있어도 일일학부형이란 말 들어보았는가?

 

오늘 내가 일일학부형을 하고 왔다. 한국에 돌아오니 별 일을 다한다..ㅎㅎ

 

오늘은 둘째 조카놈이 논술시험을 보는 날인데 또 첫째 놈이 자대복귀를 하는 날(벌써 구박십일이 가버렸다..ㅜㅜ)이기도 하다. 오빠네 부부는 큰 놈을 맡기로 하고 내가 둘째 조카놈을 맡기로 합의를 봤다. 논술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군인이 우선..^^

 

나야 군인인 적은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입대하던 것보다 첫 정기휴가 복귀가 더 힘들것 같아 안쓰럽더라. 나같은 인간은 정말 군생각만 하면 여자로 태어난게 감사하다못해 조상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다..-_-

 

어쨌든 내일은 또 면접을 본다고 해서 오전에 예비소집도 가야해 운동도 못하고 아침부터 서둘러 나갔다.

 

거기서 조카친구놈을 만났는데 그 어머니 아주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아니 왜 어머님이 안오시고 고모가?  다른 아줌마들도 저 이상한 여자는 새엄마도 아니고 뭐냐 분위기..ㅎㅎ

 

원래는 점심만 먹여 시험장 들여보내고 올 생각이었는데 부대에 다녀오는 오빠네가 늦어질 것 같아 기다렸다 저녁까지 먹이기로 했다.

 

세시간이나 걸린다니 나는 신림동이나 봉천동쪽으로 사진을 찍으러 갈 예정이었는데 막상 조카가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니 왜 내가 다 떨리던지 그냥 마음을 모아 기다리기로 결정.

 

다행히 날씨는 좋아 역시 내 로망이기도 했던 캠퍼스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일던 소설책을 마저 읽는데 묘한 기분.

 

나야 입시에 별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지만 나와 기다리고 있는 아줌마들의 심각한 수다를 듣다보니 그래 대학을 가는 일이 참 대단한 일이지 싶더라.

 

우연히도 조카놈이 두 놈이나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수시로 지원했는데 재밌는게 작은 언니딸은 전교일등이다보니 지역균형수시 오빠아들은 외고라 특기자전형 수시다. 지역균형도 어차피 성적좋은 애들이고  조카놈도 성적우수 특기자라던데 나야 뭐가 다른 지 모르겠다.

 

어쨋든 전자는 면접만 보고 후자는 논술도 본다고 해서 조카딸은 다 늦게 수험표만 받으러 나타났다. 언니딸은 아예 다른 대학은 치지도 않았다고 하고 조카놈은 고대수시도 냈는데 학교에서 시험을 보러가지 말라고 했다나.

 

그러니까 무슨 과건 서울대만 무조건 가라는 이야기니 왕 황당. 담임이 말리는데도 올해 대학을 가야하니 꼭 보겠다는 조카놈 역시 맘대로 했다.

 

조카놈왈, 자긴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는다면 대학을 안가겠단다. 내 조카만세..ㅎㅎ

 

시험이 오후 두시라 시간이야 충분해서 한참을 걸어나가 점심을 먹고 또 천천히 걸어와 차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 놈이 언제 이렇게 커버린건가 싶은 마음.

 

이 놈은 어려서 나를 정말 너무나 좋아해서 우리 둘의 구구절절한 사연도 많다..^^

 

나야 소설책이라도 읽고 있었지만 바깥에 앉아 꼼짝도 안하고 기다리는 엄마, 삼삼오오 수다떠는 엄마 혹은 아빠까지 나타난 집들, 정말 학부형이라는 거 쉬운 일이 아니더라. (난 하루로 충분하다..^^;;;)

 

수시함께 보는 친구랑 같이 왔었다며 다섯시에 맞춰 나타난 놈과 세 시간동안 논술을 본 놈, 셋이 수다를 떨며 걸어나오는데 어른 둘에 수험생 하나는 있어도 나처럼 수험생을 둘이나 끌고 가는 젊은(?) 여자는 없으니 어깨 으쓱..ㅎㅎ

 

맛있는 걸 사준다고 일식집에 들어가 두 놈을 앉혀놓고 맛있게 먹는 걸 바라보니 안먹어도 배부르다.

 

오빠 아들이 한 살 어린데 함께 다니게 되면 말을 놓느니 어쩌느니 둘이 재잘거리는 걸 보니 귀엽기도 하고 내 조카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너무나 잘들 자라서(공부만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렇게 독립적인 한 인간이 되어가는 거구나, 부모들이 큰 일했다 싶은 기분.

 

둘다 내일 일찍부터 면접이라던데 정시가 있긴 해도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집에서 특별 과외같은 걸 시킨 것도 아니고 두 놈 다 지들이 알아서 그렇게들 공부를 잘해준 것도 고마우니 그 상으로라도 말이다.

 

물론 내가 다니고 싶었던 대학이었으니 그 놈들이라도 다녀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마음도 숨기진 않겠다..ㅎㅎ

 

내일 면접 볼 놈들을 앉혀놓고는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짝을 만나는 일이니 대학에 가서 연애를 열심히 하라는 일장 연설을 한 고모이자 이모지만 (오늘 일식집 아줌마 이모냐 고모냐 하길래 이모이자 고모예요 그랬다..^^) 무엇보다 조카들이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당시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 나이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야 없다만 그래도 앞날이 창창한 두 놈을 보니 그 놈들이 겪어내야할 파닥파닥한 인생이 부러운 맘도 들더라.

 

나야 모든 인생이 각자 겪어내야할 몫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시행착오를 덜 할 수 있도록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도..

 

얘들아

 

오늘 푹자고 내일 면접 잘 치르렴

 

그리곤 모든 걸 잊고 미친척 개판도 치고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며 그 시간을 즐겨라.

 

어찌보면 진짜(?) 인생은 내일부터 시작이니까..

 

 

 

2007.11.29.서울에서..사야

 

 

32490

 

승호야

 

아줌마가 오늘 안해보던 일을 하느라 너무 긴장해서 카메라를 꺼낼 생각을 못했다. 사진없다고 투정하기 없기.

 

그리고 이제 오늘 아줌마가 무슨 일을 했는 지 믿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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