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망 좋은 방

결혼기념일 달리기

史野 2007. 10. 23. 17:37

오늘은 우리부부 결혼기념일이다.

 

아직 이혼은 한 건 아니니까 14주년이다. 그래 사실은 오늘 남쪽으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던거다.

 

내가 자랑해마지 않는 창밖 풍경속엔 신랑과 내가 결혼한 교회가 정가운데 서있다.

 

돌아오자마자 결혼반지야 빼버렸지만 어쨌든 오늘 같은 날은 뭔가 특별한 걸 해야지.

 

지난 주 드디어 카메라를 맡기고 어제 찾으러 가기로 했는데 어젠 엄마문제며 머리복잡한 일들, 아니 우울해 미칠 것같던 날이라 가지 못했다.

 

오늘 아침 강변 테크노마트까지 뛰어 갔다 카메라를 찾아와야겠다 생각하고 달리기 시작. 성수대교를 지나고 영동대교를 지나고 잠실대교를 지나 잠실철교까지 뛰는 데 1시간 15분.

 

오늘도 아령을 들고 뛰었는데도 숨이 턱에 차지도 않는게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흥건히 땀이 밴 몸으로 테크노마트에 갔더니 드럽게 아름다운 인생 마침 오늘은 휴일이라네..-_-

 

그 옆 파스쿠치에서 커피야 일어나자 마셨고 배도 고파 생토마토쥬스 한 잔을 시켜마셨더니 배는 멀쩡해졌는 데 땀이 식기 시작하니 어찌나 춥던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택시타고 올것이지 지하철을 타러 올라갔더니 바람부는 강변역. 달리면서도 내가 근무하던 학교를 지나쳤는 데 또 나는 이 강변역을 얼마나 들락거렸던가..

 

성수역에서 갈아타야하니 내려 오지도 않는 신설동행 전철을 기다리는데 또 성수역이야말로 내가 고등학교때부터 대학교때 까지 날이면 날마다 드나들던 역.

 

집나간 지 두 시간 넘게 만에 떨리는 몸으로 편의점에서 맥주며 사들고 올라와 돌려논 빨래 널어놓고 아침도 아닌 점심을 11시반은 되어 먹고 있는 데 울리는 시어머니 전화.

 

그래 결혼기념일을 까먹으면 울 시어머니가 아니시지.

 

이 못된 년은 결국 시어머니를 울렸지만 그래도 내가 보내준 사진이며 (여기 올렸던 내 집 사진을 좀 보냈다) 날씨 이야기며 이런 저런 수다를 떨었다.

 

독일날씨가 하도 춥다길래 아무리 넓은 집이라도 히터 빵빵틀고 옷 따뜻하게 입고 있으라고 너는 나처럼 달리기도 안하잖아, 했더니 울 어머니 웃으시느라 숨 넘어가신다.

 

친구는 떠나올 때 좀 매정하게 하고 떠나오지 그랬냐고 그렇게 어떻게 견딜려고 하냐는데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아니 내게 그런 대접을 받을 인간이 아니다.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길래 내 취향이야 너도 두손 두 발 다 든 취향 아니냐며 잘난척도 하고, 너무 걱정하지 말랬더니 그래 내가 걱정한다고 네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잖니 하던 그녀.

 

이러니 저러니해도 딸내미 인생보다는 당신의 체면이 우선인 친정엄마를 갖은 나같은 인간은 내 시어머니가 눈물나게 고맙다.

 

속이야 어떻든 내가 나를 책임지기 위해 온 삶이니 반찬을 여섯가지나 놓고(울 올케언니가 혼자사는 사람중에 고모처럼 잘해먹고 사는 사람 없단다..ㅎㅎ) 맛있게 식사를 끝내고 십킬로를 넘게 달렸으니 맥주도 시원하게 한 잔 했다.

 

설겆이 하고 청소하고 어제 먹다 남은 포도주 마시며 제목이 '사분'인 근사한 독일영화 하나를(이것도 강추다) 보다가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와 한참 수다도 떨었다.

 

영화를 마저보니 이 시간. 영화도 근사했던데다 친구랑 통화하며 눈물이야 또 한바가지 쏟았다만 기분 드럽게 좋다.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미래는 오지도 않았고 과거는 변하지 않고 내겐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그저 순간순간을 살아낼뿐.

 

친구야 아들이 장애인이니까 어찌 미래를 걱정하지 않겠냐고 하던데 내가 오늘 친구에게도 그랬다. 멀쩡한 인간들이라고 다 행복하냐고 그리고 이 지구상에 수십억의 인구가 있지만 과연 네게 중요한 인간이 몇 명이냐고. 그러니 네 아들도 (요즘 내 새로생긴 남자친구다..ㅎㅎ) 부모가 걱정안하고 자존감만 키워주면 이해해주는 몇 사람 만나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육체가 멀쩡해도 세상에 널린게 그지같은 인간들이다. 

 

정상? 웃기지 말라고 그래. 오늘 영화도 그런 내용이었다만 산다는 건 어차피 자신과의 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 각설하고 갑자기 서울에 27일에 나타나겠다고 해서 나를 놀랬켰던 남편은 너무 빠르긴 하지만 이왕 표도 샀으니 와라란 내 말에 마음을 돌렸다는 전화를 해왔다.

 

정말 다행이긴 하지만 또 그 전화를 어제 받은데다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다보니 어젠 기분 드러웠다..

 

내게 필요한 신발이며 가방이며 (옷은 이만원짜리도 사 입을 수 있지만 저런 것들은 그렇게는 구입이 안된다) 씨디며 가져다 주기로 했는데 걱정말라고, 우리가 떠돌고 나서부터는 그런 일이랑은 아무 상관없이 살던 남자가 알아서 토요일에는 보내겠단다.

 

그런 일을 얼마나 귀찮아하는 인간인줄 아는데다 혼자 짐을 챙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아는 지라 마음은 아프다만 그래 어쩌겠니 우린 헤어졌는 걸.

 

당신, 우리 부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내자. 당신이 행복해져야 우리가 친구하지. 당신 그랬잖아 내가 당신에게 베스트프렌드라며.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인간은 당신 인생에 나밖에 없다며. 당신이 그렇게 헤매면 우리는 베스트프렌드 못한다구. 알아 나 당신에게 빚진거 많은 거..그래도 당신은 또 그 진 빚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은 아니잖아. 당신 제발 헤매지 마라. 미안해. 내가 이렇게 웃기는 인간인거 정말 미안하다구. 당신도 그랬잖아 나 술마시며 헤매는 모습 보는 거 너무 힘들었다고.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내 엄마랑의 문제도 내가 인생을 사는 방식도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인생이 아무리 그지같아도 아니 내가 아무리 그지같은 인간이라도 나는 삶에 집착이 많은 인간이라고, 난 아직도 뭔가 나아질거라고 믿는다구. 그래서 당신 나 좋아했잖아. 나 잘할게 아니 잘해볼려고 왔다구. 이렇게 와버렸지만 내가 당신에게 뭔가 할 기회를 줘. 자꾸 나를 당신에게 미안하게 만들지마. 무엇보다 그건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니잖아. 당신이야말로 누구보다 내 행복을 바라잖아 아니 내가 정상인으로 살기를 바라잖아 나 지고 싶지 않아. 잘 살아낼거야. 내 삶에 대해 누구탓같은 건 안할거라고. 그저 내 삶을 내가 책임질거야. 누구보다 당신이 나를 도와줘.알잖아 내 삶에서 내가 믿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거...

 

아 젠장

 

어쨌든 나는 내일도 카메라를 찾기위해 강변역까지 뛸 생각이다..ㅎㅎ

 

 

 

2007.10.23.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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