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망 좋은 방

무서운 인간

史野 2007. 10. 21. 22:11

한 친구가 있었더랬다.

 

나는 그 애를 고 1때  처음 봤다. 옆반 반장이었는 데 키도 크고 얼굴도 이쁘고 카리스마도 있어보이는 아이였다. 중학교때 한시간 거리를 이년이나 통학을 했던 관계로 내 중학교에서 그 학교를 간건 딱 두 명. 그나마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고등학교 출발이었다.

 

그저 얼굴만 알던 그 애랑 고2 때 같은 반이 되었고 그 애는 역시 우리반 반장이었다. 나? 오락부장출신이다.

 

예전에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니에 언급했지만 고 2때 7명이 단짝이었고 (지난 번에 찾았다는 친구는 중학교때부터 알던 교회친구기도 하지만 그 그룹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그 애랑 나랑 친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무리고 나는 여섯 명중 다섯 명이랑 친했다만..-_-

 

이 애는 공부만 잘한게 아니라 운동도 잘했고( 나는 매달리기 몇 초 이 애는 34초였나 다 버티던 애다) 내가 이 구석 후진 동네에 살 때 그 애는 방배동 정원도 있는 이층집에 살았다.

 

그 때 폭우로 저 지대인 이 쪽에 대단한 물난리가 났었다. 골목은 무릎까지 물이 찰 정도였고 부엌 하수구에선 물이 역류하고 둑이 무너지느니 어쩌느니 난리가 아니었다.

 

내 인생최초의 물난리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하고 학교에 갔는데 그 애는 어제 비가 많이 와서 창가에서 비를 바라보는 게 참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 지.

 

나는 사실 그때 인생을 배웠다는 게 맞겠다. 똑같은 폭우가 상황에 따라 이리도 달리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득도한 것 같이 큰 깨달음이었다.

 

우연히도 그 애랑 나랑은 고3때도 같은 반이 되었다. 너희 둘이 사귀냐고 할 만큼 붙어다녔고 나는 그 애가 좋았다.

 

우습게도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때야 서로 편지 주고 받는 게 흔했다) 대충 나를 질투한다는 내용이었다. 거기다 늘 정석을 풀고 있으면 진도를 확인하러 오곤 하는 그 애가 이해가 안되었지만 도대체 나를 질투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더 웃기게도 우리는 대학도 같이 갔다. 우리 학교 통틀어 총 3명이 갔는데 그것도 우리반에서만 셋이 갔다. 과는 달랐지만 워낙 친한 친구고 거기다 이야기했던 친구놈의 학교랑 동문회까지 해서 우리는 함께 한 일들이 많았다.

 

워낙 그지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공부에 목말라 있었는데 그래 미팅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들어간 대학은 더 그지같애서 한달만인가 그 셋이 함께 미팅을 했다.

 

그 다음 날 나는 또 그애에게 고등학교때 받은 편지랑 비슷한 편지를 받았다. 이야기했듯이 내게 열등감을 느낄 아무 이유가 없는 애였던 지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카니발같은 걸 하면 밤중에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해서 우리집에서 자고 가기도 하고 아무 문제 없이 우리는 잘 지냈다.

 

나야 휴학을 했었으니 3학년 때 그애는 사학년. 우리야 취업걱정이 없었으니 (휴학했던 나만 국가고시 1회 출신이다..ㅎㅎ) 4학년이라도 널럴했고 나는 축제 전시회에 낼 그림을 그 애에게 부탁했다.

 

졸업작품이 60호였는데 당시 그림은 80호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림 모델 서는 것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 나는 평소엔 대단한 수다쟁이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할 때는 말을 거의 안한다.

 

힘들기도 했겠지만 어찌나 속을 썩히던지 나타나지 않거나 약속이 있다고 나가거나 해서 나야 인물화를 상상으로 그릴 수는 없고 막상 마무리는 선생님이 나를 모델로 해주신 덕에 전시회에 간신히 출품을 했다...-_-

 

모델이 힘든 거 아니까 밥사주고 술사주고 비느라 바빴지 그 친구에게 섭섭하거나 하진 않았다.

 

축제후 몇 달 후 그 친구 졸업식. 그 애 과 친구들이 갑자기 그 남자가 왜 안왔냐고 묻는 거다. 어떤 남자? 돌아온 대답은 왜 요즘 걔가 만나는 남자 있잖니?

 

내겐 금시초문.

 

나름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 데 내겐 그게 엄청난 상처였다. 거기다 알고보니 내 모델을 해주면서 약속이 있다고 나가던 날들도 그 남자를 만나러 갔던거다.

 

아 나는 네게 친구 아니었구나..무서운 여자인 나는 그 날로 감정 정리가 되었다.

 

그 애가 발령난 학교에 동문회 선배가 있어서 그 애를 이해해주라고 내게 전화까지 하며 그 쪽은 난리가 아니었는데 한 번 돌아선 감정을 돌이킬 순 없었다. 내가 더 무서운 인간인게 그렇다고 그 애를 안 만나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애는 결국 그 남자랑 결혼을 했고 나는 그 결혼식에도 갔었다.

 

한국에 돌아와 보고싶은 친구들도 많고 이래저래 옛 생각을 해보다 보니 그 친구 생각도 당근 난다. 문제는 놀랍게도 보고 싶단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거다. 아니 보고싶단 생각은 커녕 잘 지낼까 궁금하지도 않더라는 것. 이건 뭐 미운 감정도 아니다. 내가 없이도 그 모임이 유지되었더라면 난 또 아무 일 없이 만날 수가 있다.

 

같은 동문회였기에 친구놈이 00이는? 물었을 때도 내가 한 대답은 아무렇지도 않게 걔를 왜?

 

친했던 시간이 얼마고 그 일이 언제적 이야기냐. 나처럼 마음 약하고 사람들 믿고 바보같은 인간도 참 드문데 어찌 이런 걸까.

 

오늘도 엄마드리는 용돈 문제며 해결할 것도 있는데다 엄마가 휴대폰도 없기에 구입해서는 엄마를 만나러 갔다가 열 캡받고 왔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지 나란 인간에 또 실망하고 엄마에겐 더 실망하고 (아직도 엄마에게 실망을 한다는 자체에 더 속이 상한다.) 이렇게 바보같은 내가 미워 괴로왔다.  

 

그런 내가 이렇게 냉정할 수 있다니 내 버릇대로 그 감정들을 분석해보며 내가 나한테 놀라고 있는 중이다.

 

나란 인간,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참 무섭단 생각이다.

 

젠장 어쨌든 내 남자가 조만간 일박이일 한국에 다녀가겠단다. 그건 내가 아는 내 남자 스타일이 아닌데다 내가 한국에 돌아온 지 내일이어야 겨우 두 달. 우리가 지금 만나기엔 서로에게 쉬운 상황이 아니지만 그래 못 올건 뭐 있겠냐고 쿨하게 메일을 보내놓고는 또 술만 퍼마시고 있는 중이다.

 

내가 한국에 나올 수 있었던 건 내가 무서운 인간이기 때문인 걸까.

 

아니 나는 계속 무서운 인간일 수 있을까.

 

나는 정말 내 인생을 잘 살아내고 싶은 데 참 어렵다...

 

 

 

 

2007.10.21.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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