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망 좋은 방

비오는 날에

史野 2007. 9. 18. 14:27

비가 내리는 날 오랫만에 여유롭게 창가에 앉아 있다.

 

주말에야 집에서 시간을 보내긴 하지만 주중에는 뭘 산다고 늘 바삐 돌아다니거나 청소한다고 난리를 쳐댔으니 어쩌면 오늘이 이 집에서 처음으로 보내는 여유있는 시간인 지도 모르겠다.

 

비는 내리는데 음악 볼륨도 왕창 높여놓고 역시 오랫만에 대낮에 벌건 포도주 한 잔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포도주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분위기에 젖어 마시는 건 또 얼마만인지..

 

낮이지만 버릇대로 촛불까지 켜놓았다.

 

사실 오늘도 살 것들이 있고 또 청소도 쌓였지만 비도 오고 분위기 좋은 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나마 어제 미친애처럼 바닥을 닦아냈더니 이제 집이 좀 폼이 난다. 바닥이 더러운 건 아닌데 뭐랄까 아무리 걸레질을 해도 빛이 안나길래 니스칠을 해야하나 그냥 외국에서처럼 신발을 신고 살아야하나까지 고민을 하다 사람들에게 참아달라고 욕먹었다..ㅎㅎ

 

어제 수세미에 옥시싹싹을 묻혀 닦아댔더니 역시나 그게 다 묵은 때였다. 이제야 물걸레질을 하면 걸레질을 한 티가 조금은 난다.

 

아마 이 집여자는 분명히 발바닥으로 걸레질을 하는 사람이었을 거다.

 

그래도 이젠 그녀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그래도 행복하게 잘 살았을텐데 왜 괜히 아무상관없는 내가 그녀의 삶을 욕하겠는가. 못 참고 죽어라 닦아대는 건 내 문제지 그녀의 문제는 아닌거다.

 

그래 나 머리 복잡한 거 어찌알고 이렇게 뺑뺑이를 돌려대냐 고맙기까지 하더라. (기독교식으로 하면 신이 다 미리 알고 준비하신 거랄까..^^) 흉본거 반성하고 뚱뚱해도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기도했다.

 

아 물론 이렇게 되면 내가 월세를 내고 살아야하는 게 아니라 청소비를 받아야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다만..ㅎㅎ

 

어제 또 전화하신 시어머니는 그러다 끝이 없겠다고 청소는 그만 포기하라는 데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이 작은 집을 삼주동안 닦아댔는데도 아직도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안그래도 담배때문에 문을 열어놓고 사니 쌓이는 먼지때문에 루틴청소도 벅찬데...^^;;;

 

어쨌든 어제는 또 재밌는 일이 있었다. 지난 번에 가시님이랑 숯을 사러 들렀던 꽃집아가씨가 그때 날더러 이혜영을 닮았다고 했더랬다.(아니 내게 그런 백치미가 보인단 말이냐구????)  

 

내가 보기엔 머리모양도 그렇고 당신이 닮았다고 하고 집에 왔는데 어제 또 갔더니 이 여자가 너무 심각하게 뭐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보는 거다. 그냥 직장인은 아닌 것 같다면서. 직장인이면 이 시간에 돌아다니겠냐며 웃었는데 이 여자 갑자기 더 심각한 얼굴로....

 

저기 연예인이시죠? 허걱. 이렇게 생긴 사람도 연예인 합니까? ㅎㅎ 

 

아니 이제 일본인도 모잘라 연예인이냐? 안그래도 사람들에게 내가 아무래도 여기 사는 사람들과는 분위기가 달라보여서 일본인 얘기가 나온 것 같다고 했는데  연예인이냐니..내가 가끔 하듯이 요란한 옷차림을 하고 갔으면 말을 안한다. 청바지에 티하나 걸치고 갔는데 왜 뜬금없는 반응이란 말이냐.

 

이러단 비쏟아지는 데도 안 빠지고 매일 아침 뛰는 여자 아무래도 북한 특수공작원인 것 같다고 신고들어갈 것 같고 어쩌면 외계인이라고 나사에 보고가 들어갈 지도 모르겠으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하하하

 

나도 연예인 닮았다는 이야길 안 들어본 건 아니다. 강부자..^^ 고등학교때 남자애들이 장난치던 건데 내가 또 누구냐. 전원주 안 닮았다고 해서 고맙다고 했지..ㅎㅎ( 아 물론 전원주 아줌마에겐 미안하다..-_-)

 

내가 한국 올 때마다 우리 올케언니 고모 스케줄 관리해주는 사람이 필요하겠다고 농담했었는데 타인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_- 

 

오랫만에 돌아온 고향은 지난 번에도 썼지만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참 여러가지로 나를 놀래키고 있다.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 곳곳에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아무리 종로서적이 없어졌어도 내 고향이란 생각이 든다.

 

산행이라면 환장(!)하는 내가 일요일엔 야산이긴 해도 용마산에도 아침에 올랐었고 오빠네 식구들이랑 찜찔방에 가서 수다도 떨었다. 누가 샤워물을 그냥 틀어놓고 갔길래 기절하며 끌려고 난리를 쳤더니만 자동이란다..-_-

 

자기가 쓴 수건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던져놓고 가는 여자들을 보며 황당하고 차마 그 것까지는 내가 정리해즐 생각은 없었다만 교육열이 세계 최고라는 이 나라는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한숨은 나오더라.

 

지난 글에 올렸던 친구랑도 연락처를 알게 되어 어제 통화를 하고 모레 만나기로 했다. 나쁜 것...ㅎㅎ 그 친구어머님 목소리를 듣는데 그 세월을 너머 어찌나 또렷이 어머님의 표정까지 기억이 나던지.

 

어쨌든 또 그 친구랑 연락이 되었으니 나랑 둘이 여행을 다니곤 하던 한 친구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윗 친구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니 많이 변하진 않았겠지만 이 친구는 아이를 임신했던 것 까지 내가 기억하니 많이 변했을까. 여전히 가끔 기타를 잡고 김광석의 노래를 부를까.

 

우리가 둘이 여행을 떠난다면 믿을만한 친구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아버님을 설득해주시던 그 멋쟁이 어머님도 많이 늙으셨겠지.

 

나야 학창시절 때도 워낙 다양하게 친구들을 사귀었기에 그래도 연락처를 알 수 없을 친구들도 많지만 시간이야 넉넉하니 차분히 찾아보면 이렇게 연락이 되듯 다 만날 수 있으리란 희망에 부풀어 있다.

 

보고싶고 그리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떻게 이렇게 오랜 세월 연락을 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었을 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이렇게 신나서 사는 동안 내 남자는 괴로워 죽어가고 있다. 그래도 그 남자답게 자기 걱정은 말라고 네가 떠난 건 역시나 바른 결정이었던 것같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거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네가 네 미래를 두려워하는 그 동안 자기는 도대체 뭘 한건 지 왜 더 너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지 자책하고 있다니  정말 바보같은 남자다. 여행하는 내내 그렇게나 충분히 이야기를 했건만...

 

너의 부재가 가끔은 그냥 네가 잠시 시장에 간 것 같아 그게 견디기 너무 어렵다길래 출장을 가면 나을 거라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마침 출장지는 우리가 함께 살았던 홍콩과 상해다.

 

우리부부는 상해와 홍콩에서 가장 행복했더랬다. 네가 더이상 나를 떠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든다며 이젠 아이를 낳자고 신랑이 말했던 건 상해였고 내가 이젠 내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홍콩이었다.

 

드럽게 싸우고 별거까지 했던 부부가 이제 우리는 많은 것을 극복했다고 이렇게 늙어가면 우리 인생도 나쁘지 않을거라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도시에 신랑이 다시 갔을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될 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래도 우리가 그 아름다왔던 시간을 함께 보내고 헤어짐을 괴로와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거라는 메일을 보냈다.

 

그래 나 독한 여자다. 누가 내게 정해준 대로 살아본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그렇게는 살 지 않을 거다. 나는 그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다.

 

자꾸 사람들이 물어보는 데 그동안 내 인생 불행하지 않았다.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앞으로도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나는 누구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고 상대가 그래도 행복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왔고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저 지난 번에도 썼지만 난 여기 살려고 왔는데 내 남자가 전혀 변수가 안 될 수는 없다. 그 남자의 행복이 내겐 내 행복보다 우선하니까.

 

독일에 갔을 때 시어머님이 그랬다. 그 애를 보면 여전히 널 얼마나 사랑하는 지 느껴진다고 어쩌면 네가 그 애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건 지도 모르겠다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간절히 행복을 바라지 않을 거라고 그저 지금은 그 행복을 내가 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젠장 이런 글을 쓸려는 게 아니었는데 또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그 사이 비는 그쳤고 창밖은 강남까지 맑게 보이기 시작한다. 태풍이 지나간 후 어제도 그랬지만 드럽게 아름답다. 어제 아침엔 달리기를 하면서 햇살에도 이런 색감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 가을 햇살이 찬란한 거야 유명하다만 내가 예전에 겪었던 그 가을햇살이 2007년 9월 17일 태풍 나리가 지나간 그 아침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찮은 풀잎 끝에 내려앉은 그 햇살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래 산다는 건 이런 거구나 참 아름다운 거구나 생각했더랬다. 그러다보니 0.5킬로짜리 아령을 양 손에 들고 뛰었는 데도 오분이나 단축해서 달리는 경사도 일어났다.( 운동기구를 사온 놈이 부탁하지 않은 아령까지 사왔길래 누나는 4킬로가 필요한데 0.5킬로가 뭐냐고 구박했더니 누나 그럼 들고 달리라길래 시키는대로 하는 중이다..ㅎㅎ)

 

그래 나 신나게도 살고 서럽게도 못 울고 그저 눈물을 철철 흘리기도 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14년 세월을 산 우리가 헤어졌는 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면 우리 결혼생활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그와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도 아프고 그냥 그런 것도 삶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이겨낼 뿐.

 

비 온다고 폼잡고 있었는 데 비도 그쳤으니 이제 오늘 해야할 일들을 해야겠다.

 

그 사이 포도주는 반 병 조금 넘게 비었고 내 평소실력으로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지..ㅎㅎ

 

어쨌든 무엇보다 카메라나 빨리 고쳐야겠다.

 

찍어야 할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가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다..^^

 

 

 

 

 

2007.09.18.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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