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흔적

베니스에서의 죽음

史野 2007. 5. 4. 17:56

20060531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니 아름다움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일까. 삶을 걸어도 좋을 만큼 절대적인 걸까.

 

여기 그 극단적 선택을 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있다.

 

 

 

 

토마스 만의 소설을 비스콘티가 영화화한 후 말러의 음악과 함께 삼십 년 이상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 영화를 드디어 보았다. 나는 아직 소설을 읽어보지 못해 소설과 비교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본 게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조함과 욕망 사이에서 헤매는 주인공, 말러의 음악과 회색 빛 베니스가 어우러진 화면들은 죽음을 전제로 한 영화여서일까 참 스산한 느낌이다.

 

이태리에 오 주나 있었으면서도 들리지 못했던 베니스. 그래서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그 곳의 장면들은 그 스산함에도 불구하고 무척 매력적이다. 심지어 더러움이 느껴지는 골목길조차도.. 

 

 

 

영화속 주인공 아센바흐가 토마스 만 (1875-1955) 자신인지 아님 구스타프 말러 (1860-1911)인지 어쩌면 그 둘다인지 모르겠다. 딸아이가 죽은거나 작곡을 하는 거나 죽음에 공포에 시달리는 건 말러를 닮긴 했지만 또 젊은 소년에게 감동하는 건 토마스 만을 닮았으니 말이다.

 

딸아이가 죽고 새로 발표한 음악이 대중에게 외면당하여 쇠할때로 쇠한 한 작곡가는 베니스의 리도섬을 찾는다. 옷을 옷걸이에 건채 운반할 수 있는 커다란 옷 트렁크를 가지고 말이다.

 

 

 

그 곳에서 그는 폴란드의 한 소년에게 매료당하고 끊임없이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인다. 리도 해변에서, 베니스의 추레한 거리에서 타지오의 뒤를 밟는 아센바흐의 시선을  따라가자면 그 늙은 주인공이 애닯아 내 등에서 진땀이 날 지경이다.

 

 

문제는 아센바흐의 그런 모습을 즐기는 듯한 타지오의 표정과 행동이다. 겨우 열 몇 살의 소년이 어떤 늙은 남자가 끝도 없이 자기를 쫓는데 그런 쿨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그는 때론 무심한듯 때론 유혹하는듯한 모습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 이야기를 토마스 만 (아름다운 어린 소년에게 끌렸던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빼고 본다면 어쩜 타지오는 실제하는 인물이 아니라 아센바흐가 추구하던 그 절대적 아름다움의 환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는 불가능한, 잡히지 않는 그 절대적 아름다움 때문에 망가져간다. 그 것에서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포기하지 않고 사로잡혀있다 해변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를 죽인 건 전염병인지 혹은 타지오를 향한 욕망인지

 

삶의 허무와 절망으로부터 지켜줄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인간의 모습은 거의 공통적이지만 과연 우리는 그 무엇인가에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영화를 보고나서 좀 찾아보니 벤쟈민 브리튼이 오페라로도 만들었다고 하고 독일에서는 몇 년전에 춤으로 재구성 되었다니 소설이 더 궁금하다. 언제 소설도 읽고 오페라도 보고 가능하면 춤도 보고 또 베니스에도 가보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곤돌라도 타보고 말러의 음악을 들으면서 혼자 노천카페에 앉아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