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묻은 책장

이덕일-조선 왕 독살사건

史野 2007. 5. 4. 00:21

안이한 역사의식 

 

2006-02-12 21:52

 

크게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책을 읽고나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조선시대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이야기들이고 책은 술술 읽힌다만  몇 가지 딴지를 걸어야겠다.

 

삼전도치욕으로 청나라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의 독살건을 다루는 장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한 때는 서기 1644,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하여 개국하기 232년 전으로, 일본이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한 때보다도 211년 앞섰다. 소현세자의 이 개방적인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그런 만남이었던 것이다' (p 108)

 

난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도 짜증이 나지만 역사학자까지 이러는데는 정말 기가막힌다. 개방적인 사고의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독살당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면 정말 그게 두나라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제목이 '조선왕 독살사건'이고 조선왕 4명중 한명이 독살설에 시달렸다고 한다. 거기다 반정만 두 번이나 일어났으며 소현세자외 봉림대군이었던 효종과 효종의 아들 현종이 모두 연달아 독살설이란 의심을 받았다. 거기다 저자의 입으로 왕권이 불안했고 사대부가 집권하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천주교를 믿고 주자학에 대항했다면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도 역시 독살당하지 않았단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당시는 임금의 말보다 주자의 말에 더 복종하는 막강한 권력의 송시열과 그 당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던 때 아닌가 말이다. 저런 주장자체가 이 책의 주제에 대한 자기부정이다.

 

거기다 소현세자 한사람과 한 서양인 신부와의 교류만을 페리 제독에 의한 개국과 비교한 것도 적절치 못하다. 1853년에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을 해서 겨우 이십년이 흐른 1876년에 벌써 힘을 기르고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면 일본이 무슨 날으는 원더우먼 처럼 초능력이라도 가졌단 말인가 

 

일본에 처음 선교사가 들어간건 1549년이고 수만명이 죽었다는 기독교박해가 행해진건 17세기 초반이다. 17세기 후반 일본은 세계에서 유명한 은산출국으로 쇄국정책하에서도 나카사키항에선 중국과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구가 오백만 추정인데 반해 일본인구는 그보다 다섯배인 이천오백만이 넘어 있었다한다. 에도시대미술이야기하며 언급했지만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이 되기 백년전에' 벌써 에도의 인구는 백만이었다. 일본과의 7년전쟁중 잡혀갔던 포로송환문제에 대해서도 포로들이 일본에서는 돈을 벌 수가 있다고 조선에 돌아가길 거부할 만큼 화폐경제가 발달해 있었다고도 한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 같지만 이런 상황이었는데 저 비교가 가능하며 두 나라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을까역사속 가정이니까 뭐라 할 수 없다고 한참을 양보하더라도 저런 표현은 너무 도발적이고 극적이다. 역사서는 환타지소설이 아닌 탓이다.

 

5장 현종때에 언급된 예송논쟁만 해도 그렇다. '그게 쓸데없는 정쟁이라고 일인학자들이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유포시켰지만 그게 그리 쓸데없는 정쟁은 아니었다' 하기에 지금껏 쓸데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했던 나를 바꿀만한 새로운 해석이 있나 기대를 했다. 그런데 말만 이렇게 해놓은 저자는 내내 피비린내나는 정쟁과 왕권의 연약함을 한탄할 뿐이지 그 논쟁이 조선에 끼친 긍정적 역할에 대한 부분은 없다. 그럼 뭐가 쓸데없는 논쟁이 아니란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사실에 근접하는 역사만 있지 바른 역사란 게 없는 상황에서 역사를 읽고 해석하는 게 어려운 일인건 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읽는건 어떻게든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객관적 시각을 갖으려 노력하며 현재의 위치를 반추해보려는 거 아닐까.  나는 일본외에 중국도 무서운 속력으로 성장하는 지금 동아시아 관계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그리고 나의 위치를 제대로 가늠해 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역사서를 읽는다는 말이다. 안그러면 무엇때문에 돈투자하고 시간투자 해가며 역사서를 읽는단 말이냐.

 

왜 그때 바보같이 그렇게 했냐고 조상탓을 하자는게 아니라 그때 왜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더 고민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반성하는데서 현재가 또 우리의 미래가 보이는 것이 아닐까.

 

대중역사서 하나 읽으며 너무 열을 내고 있긴 하지만 안이한 자세가 아닌 좀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비교 분석적인 역사학자들의 글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