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하루키의 스프니크의연인을 읽었다. 사실 나는 그의 유명세에 비해 하루키를 잘 모른다. 십년전 상실의 시대와 슬픈외국어를 읽은 후 관심이 있었으나 거의 그의 책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 작년이었나 독일어로 나오코의 미소라 번역된 상실의 시대를 또 읽으며 그가 다시 궁금해졌다는게 맞겠다. 독일어로 어마어마한 번역본이 나와있는 걸보니 이제 하루키책은 세계 어디를 가나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
거의 읽지를 않았으니 그의 책을 비교한다는건 불가능하고 이 책은 내게 상실의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분이 들게했다. 책장을 덮으니 왠지 가슴이 싸해지고 머리가 복잡해지는게 말이다. 역시 세상과의 소통의 어려움이 등장하고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들은 때론 너무 내안의 나를 적나라하게 들어내보이기도 하고 때론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어느 혹성에 살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불현듯 내게도 그렇게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상대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쉽게 포기하고 내 스스로와 타협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과 그래서 덜 고독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드니 이미 내게 열정은 사그라들고 익숙한 소파의 편안함이 우선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저 편의 나를 마주하는데 대한 두려움일지도.
10월13일
빈센트의 구두
처음 빈센트의 저 구두를 반고흐미술관에서 보았을때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켤레의 구두가 주는 그 빈듯한 느낌속에 내 상념이 마구 마구 밀려 들어갔다. 결국은 복사본 한 장을 사와 집에 걸어놓았고 나도 신발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뜬금없이 했더랬다.
그래서 제목만보고 선뜻 구입을 했으나 한동안 놓아두고 있다가 읽기 시작한 책. 푸코와 데리다 샤르트르 하이데거 이 네 명의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그림이야기라니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직접 저 철학자들이 쓴 책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은거 같다. 사르트르나 하이데거는 옛날 옛적 책을 읽었음에 분명하지만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읽은건 읽은게 아닐테니 말이다.
푸코와 데리다책은 얇은 걸로 한 권씩 구입은 해놓았는데 독일어다보니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고해서 누군가 정리해서 이야기해주는 이런 책이 내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철학자가 아닌 불문학자여서인지 글은 전반적으로 평이해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가끔 거슬리는 불어표기등 그리 만족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뭐 역시 가장 중요한건 내게 비교하고 어쩌고 할 철학적 사전지식란게 없다는 거였겠지만..그래도 늘 서양철학책종류를 읽다보면 느끼는건데 번역어에대한 거부감이 크다.
사유의 체계가 다르고 그 사유를 하는 언어 즉 도구가 전혀다른데 과연 번역을 하고 또 다른 도구로 그 사유에 공감하는게 가능한걸까하는 의심
어쨋든 요즘 기분이 그래서인가 괜히 철학이 말장난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저 구두를 농부의 구두라고 생각하고 하이데거는 한마디로 시를 썼더라. (저자는 아름다움에 시라는 표현을 썼지만 내가 쓰는 의미는 시를 소설을 쓰네에서의 그런 의미다)
내가 그림앞에서 감동먹었던 걸 생각하면 사실 이해못할것도 없지만 그걸 이론으로 발전시킨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어쨋든 미술사학자 샤피로가 반론을 펴고 또 데리다가 반론을 폈다고 하는데 내용을 보자면 그건 반고흐의 구두다, 혹은 한 쪽이 더 큰데 그걸 어찌 한 켤레라고 볼 수 있느냐등등.
내가보기엔 그냥 반고흐의 한켤레 구두다. 그 처럼 왕성하게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자기 구두하나를 가지고 몇 장을 그릴 수도 있는거고 그리다보면 하나가 좀 커져보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님 세잔이 그랬듯이 조금 커보이는게 구도상 안정적으로 보여 그랬을 수도 있고 말이다.
물론 범인인 내 생각이다.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의심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이 말은 근데 쓰면서도 내스스로 설득당하지 못하는 그런 문제지만 말이다)
신발과 인문학이라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다. 앞으로 그림을 보게될때 신발에 먼저 눈이갈거라는건 결국 이 책에서 얻은 득이다.
패션이 사랑한 미술
그리곤 이 책을 읽었다. 몇 달전 일이긴해도 모리미술관에서 보았던 아르마니전시회가 퍽이나 인상적이었고 또 그림을 보는데서 복식만큼 재밌는 것도 없기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옛 그림에서 복식문제를 분석했다기보다 현대미술과 현대의 주도적인 패션디자이너들을 엮어놓은 책이긴했지만 글쓰기도 마음에 들고 잘 모르는 패션분야여서인지 재밌게 읽었다.
얼마전 갑자기 바쁘다는 친구덕에 단지 공짜 샴페인을 마실목적으로 루이비통패션설명회에 다녀왔었는데 참 황당했었다. 물론 전적으로 내 미적감각의 문제이긴 했어도 도대체 저런 옷을 저 돈을 주고 입고 싶을까하는 의구심.
결국 하이 패션은 취향의 문제가아니라 구별되어지고 싶어하는 인간심리의 문제라는거.
11월 7일
이건희시대
이 책은 읽은지 좀 되었는데 리뷰를 좀 써볼까하고 혼자 발버둥치다가 포기했다. 막상 쓰려니 하고 싶은 말, 떠오르는 말은 왜 그렇게 많은건지..
딱 시간이 없어서 편지가 길어졌다는 누구의 말처럼 중언부언되기 십상이었다.
한국사회에대해 책을 열심히 써대는 강준만의 책은 사실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이후 겨우 두 번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강준만씨 글쓰기다란 생각은 왜 드는건지.
이 책에서 강준만은 이건희시대와 한국학을 연결하려는 야심을 보이는데 그게 내게 어필하더라. 실제로 이건희가 그렇게 중요해진 시대에 한국에 살지 않았기에 그 분위기를 제대로 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김규항이나 박노자 등이 이해하는 한국사회보다는 내게 훨씬 와닿는다.
지금의 한국이 어떻게 이루어졌냐는 물음엔 끝도없는 이유를 댈 수 있을만큼 다양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만도 백여덟가지는 댈 수 있을거 같으니까.
그 이유를 골라 좀 무리하자면 기업만으로 볼때 문제는 꼭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만 이루어진건 아니라는거. 심지어 여덟명 정도의 중창단도 리더가 없으면 노래 한 곡을 제대로 부를 수가 없다. 그 이유가 어찌되었건 어떤 모순이 있건 우리는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거 아닐까.
지금 방글라데시에선 열네살 이하의 오백만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학교도 가지 못하고 하루종일 일을 하고 있다는데 우리 중 어느 누구가 정의를 위해서라면 내 자식이 그럴 수도 있다는 그 상황이 좋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얘기가 약간 더 흘러버렸는데 이 책에서 언급되듯 일단 지금 우리의 경제가 대외 의존도 70퍼센트라면 지금 이 모든게 얽혀버린 그지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에 고민해야 할 거 같다.
이 책은 그런 쪽으로 문제제기만 할 뿐 공감할 만한 방향을 제시한 건 아니다. 그래서 이 문제와 상관된 정치와 한국만이 아닌 경제와 한국을 분석하는 그의 견해와 한국사회의 담론을 기다린다.
두 글자의 철학
이 책은 읽으면서 계속 이건 사기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내가 평소에 그렇듯이 제목만 보고 골라들은 책이다.(그러니 결국은 저자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평소 한국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두 글자가 가지는 폭력이 크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 제목을 볼때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듯 반가왔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의 그 두 글자가 만들어 내는 폭력과 권력관계..그러니까 한문을 어원적으로 분석하며 한국사회에 끼치는 영향쪽으로 이 책을 이해했었다.
유감스럽게도(최소한 내게는) 이 책은 그 두 글자로 된 개념들에 대해 저자가 얘기하듯 천마디로 풀어낸 말하자면 대중적인 설명서다. 사실 제목이 나를 배반하는(?) 책들은 보통 중간에 그만읽는데 이 책은 그래도 끝까지 읽었고 그래도 내게 즐거운 책 읽기가 된 건 시기와 질투라는 개념때문이다. 내게는 시기와 질투는 사실 그 의미가 비슷하고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했던 단어가 있다면 부러움이다.(부러움은 세 글자라 언급이 안되었을까? ㅎㅎ)
내가 부러움이라고 이해했던 영어의 envy 를 저자는 시기라고 번역을 하고 있는데 한국어 마저 헷갈리는 마당에 궁금증만 생길뿐 뭐라 지금 덧붙이지는 못 하겠다. 그럼에도 내가 이 문제에 엄청난 관심을 갖는 건 나 역시 시기와 질투가 아닌 부러움과 시기라는 의미로 두 번이나 실 생활에서 곤란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언어를 상대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내가 시기와 질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할 거라는 의심이 들었고 그건 어쨋든 내겐 엄청난 수확이자 절망이기도 하다.
근대미술의 뒷 이야기
이 책은 우리나라 근대 서양미술의 뒷이야기이다. 잡지에 실렸던 글을 모아놓은 거라 연구분석이라기보다는 자료를 중심으로 정보성 경향이 강한 그런 글들이다.
서양미술과 산업혁명 이후부터 이차대전 전까지의 동서양의 삶에 관심이 많은 나에겐 딱 관심에 맞는 그런 정보를 준 책이다.
파크라이프
그리고 페이퍼로 사진을 올렸듯이 이 책을 읽었다. 요시다슈이치는 역시 제목만 보고 고른 동경만경으로 알게 된 작가.
일본소설에 대해 말 할 수 있을만큼 일본소설을 읽지 않았기에 비교는 불가능하고 우연히 만나 공원에서 하루를 잠시 공유하는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담담하게 표현하기란 참 어렵지 않을까 싶도록 표현력이 뛰어난 작가란 느낌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모두가 엘리트가 되어야하는 사회가 아닌 이 일본이라는 곳에서, 타인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나와는 사실 아주 다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보편적 묘사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낯선 장면들에도 이해가 가는건 아닐까.
연인
마르크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독일어로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자하철용으로 들고 다녔는데 내가 기껏해야 한 정거장에서 세 정가장까지의 노선을 그것도 가끔 왔다갔다 하기에 얼마나 오래 읽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장자크아노의 영화를 좋아하고 스토리를 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읽기 시작한 소설이였는데 읽다보니 꼭 음악같다는 느낌을 주는 글쓰기다. 기회가 닿으면 진짜 음악이름을 따온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가다.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책읽기의 즐거움이 가장 컸던 책은 사실 이 책이다. 나는 몇 년전에 그의 책을 하나 읽었었기에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기대치 이상이었다.
사주명리학이란 사실 내가 이 나이까지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점이란다. 말하자면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내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분야이기도 한데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로와 읽기 시작해서 끝장을 본 흔지 않은 책이고 물론 그건 저자의 글쓰기 능력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식교육을 받은 걸로도 모자라 교회까지 다녔던 나는 한국을 떠나 살며 가장 열받는 일이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전통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거다. 아무리 서양의 역사나 뭐를 떠들어댄들 내가 그들이 아니지 않은가.
나란 인간에 대해, 아니 내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습득했던 그 자양에 대해 모른다는 건 사실 내가 먹는 밥이 멥쌀인지 보리쌀인지를 모른다는 것과 같은 서글픔이다.
이 책을 읽은 나는 무엇보다 점을 한 번 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심지어는 저자에게 내 사주를 물어볼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으며
무엇보다 기운빠지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내가 가야할 길이 멀고 아득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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