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묻은 책장

낯선 형식의 소설

史野 2024. 9. 6. 19:40


에르난 디아스의 트러스트

어디선가 오바마대통령 추천이라길래 궁금해서 샀는데 이 소설을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4부로 되어있는 소설을 1부는 공황시대의 뉴욕주식부자이야기로 나름 흥미롭게 읽었는데 2부부터는 뭔가 이상한 거다
같은 사람들 이야기인가 했더니 아닌 것 같고 1부랑 어떤 연관이 있는 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무슨 소설인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읽다 말다 하기를 여러 번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끝을 보잔 생각에 계속 읽는데 3부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라니까
월스트리트의 최고부자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이탈리아 이민자인 아나키스트 아버지와 그 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이어지고
사백페이지 소설인데 이백오십 페이지를 넘어서야 앞의 이야기들이 뭔 말인지를 알았으니 도대체 작가가 의도한 게 뭔지 모르겠더라
사람들은 정말 이런 소설을 어찌 재밌다고 잘 읽는 건지 신기하단 생각까지 들더라지

물론 앞쪽이 뭔 소리인지를 알고 나니 다음부터는 쑥쑥 읽히기는 했는데 사야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다
1부도 소설 속의 소설이고 2부도 대필된 자서전 말하자면 역시 다른 버전의 소설이고
이런 얘기니까 다시 돌아가서 비교하며 잘 읽어봐라 뭐 그런 강요의 느낌도 들고 뭔가 너무 큰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맞는 구조물을 다 준비하지 못한 느낌이었달까
가까운 사람들의 배신도 너무 황당해 실소가 나왔다
사실 꽤나 흥미로운 주제라 그것만으로도 사백페이지 소설로 충분했을 거 같은데 말이다

모르는 단어도 많고 영어공부 중이기도 해서 원래 두 번을 읽은 생각이었는데 작가가 두 번을 읽어야 이해하게 장치를 해놓은 거 같아 청개구리 사야는 안 읽기로 했다
(두 번 읽었더니 이해가 가면서 감동했다는 애가 있어서 더 짜증)

물론 사야수준에 어렵기도 했다만 또 사야 영어실력이 문제인가 새로운 형식에 적응 못하는 나이 탓인가 자학할 뻔도 했는데 읽고 나서 몇 리뷰를 보니 사야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나마 위로받았다
무슨 자기 합리화 안전장치도 아니고 웃기긴 하다만 정신건강에는 도움이 된다

언어에 관심이 많은 사야는 작가의 이력이 놀랍더라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가 스웨덴으로 이민을 갔던데 집에서는 스페인어를 쓰고 나가서는 스웨덴어를 썼다는 작가가 아무리 영국에서 대학을 다녔다고는 해도 논문도 아니고 이런 영어소설을 쓴다는 게 그저 경이롭다
하긴 뭐 한국어 잘한다고 다 한국어로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 그의 재능과 노력이겠지만 말이다

요즘 간절히 위로와 감동이 필요한데 누워서 편히 읽을만한 그런 소설 없으려나
책장에는 제발 나를 읽어주세요 하는 책들이 가득인데 막 당기는 게 없네
책이 문제인지 사야가 문제인지 요즘은 집중해서 무언가를 읽는다는 게 참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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