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따뜻한 은신처

독일어

史野 2016. 6. 19. 20:52

오랫만에 시누이랑 통화를 했다

한 십오분정도였지만 시누이가 사야이상으로 따발총인 관계로 남들이 이십분 이상 할 이야기가 오간다.

어쨌든 한참을 이야기를 하는 데 이 왠수땡이가 사야더러 왜그렇게 아직도 독일어를 잘하냐는 거다.

그때는 쓰고산 세월이 얼마냐고 그냥 넘어갔는 데 전화를 끊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보니 갑자기 생각이 독일어에 머물러 움직이질 않는 거다.

잘하긴 개뿔!! 단어도 생각이 안나 뒤죽박죽인 데도 용케 잘 알아듣는 시누이가 더 신기한데다 그래 한국에 돌아온 지 구년이 다 되어가고 독일어를 전혀 안쓰고 사니 어찌보면 참 당연한 질문인데 그 말이 왜그렇게 아픈거니.

예전에 누군가 사야더러 한국어를 왜그렇게 잘하냐고 그랬던 때나 독일친구들이 니가 무슨 한국사람이냐고 외국인이 한국사람인척 하다가 한국에서 쫓겨난 거 아니냐고 농담했을 때만큼 비슷하게 아프더라.


십오년동안 사야가 독일어때문에 받았던 고통과 독일어를 잘하고 싶어 발버둥쳤던 나름의 그 어마어마했던 노력이며가 결국은 십오분통화에 칭찬을 받을만큼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겠지.

독일어를 쓰지 않는 나라를 십년을 떠돌면서도 독일어는 사야에게 늘 아픈 가시였고 지금도 한국어를 쓰고 사는 게 너무너무 좋을만큼 스트레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오랜시간 잠꼬대로도 떠들던 일상언어였으니까.

떠돌면서야 독일어를 쓰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어도 사야의 삶중 삼분의 일 가까이 되는 시간을 사야는 독일어로 웃고 울고 감동도 하고 그랬으니까..


앞으로 또 그런 삶을 살고 싶냐고 물으면 당근 노 땡큐이긴해도 허탈하달까 허무하달까

안다 안다고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사야도 없고 사야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거라는 걸..

물론 그게 아니라는 걸 이성은 알고 있는 데도 모래시계처럼 스르르 그 시간들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또 어쩔 수 없다


그건그렇고 시어머니의 상태를 정확히 들었다.

무너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고 시누이가 엄청 걱정을 하더라.

나름 책임감을 가지고 근처 요양원으로 모셔갈 생각도 하고 사적으로 요양보호사같은 것도 어레인지하고 아들보다는 딸이나을거라며 자기가 돌봐야하는 게 맞다는 데 얼마나 고맙던 지 

자기엄마니까 사야가 고마와할 일은 아닌 데 어쨌든 사야도 오랜시간 가족이었던 데다가 시누이를 사야가 잘 아니까 그런 책임감을 갖는다는 게 시어머니복이다 싶어 다행이다.


예전부터 집안일에는 관심도 없고 시부모님은 당연히 사야네가 책임져야하고 시댁집도 사야네가 자기 추억을 위해 물려받아야하고 아버님 아프실 때도 자기아들만 챙겨 사야를 엄청 열받게 하기도 했는 데 오늘 너무나 심상한 목소리로 A(사야의 전남편..ㅎㅎ)는 절대 감당 못한다고 자기가 해야하는 게 맞단다

시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사람이 늙어가는 것에대한 이야기도 잠깐 했는 데 삶에 대한 이해가 팍팍 묻어나 조금 놀랬다.

여유가 사람을 만드는 건 지 아님 시누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 데 사야만 몰랐던 건 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 얄밉고 재수없는 스타일은 아니니 오해는 말길..^^;;)


오랫만에 시누이가 전화한 이유

오늘 사야 생일이다.

작년까지는 안 잊고 챙겨주는 게 참 고마왔는 데 오늘 보니 아마 본인이 치매걸리기전까지는 전화할 기세더라..ㅎㅎ


사야는 뭐가 어쩌니 저쩌니 해도 생일만 되면 기분이 참 좋다

물론 이건 생일부터 또 한 해가 시작된다는 독일의 영향이 크다만 남들이 새해를 맞아 심기일전하는 것처럼 사야는 생일이 그렇다

그래서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는 이 사야의 인생을 조금은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열두시가 되던 어제 밤부터 의지를 마구 불태우고 있었는 데 그 놈의 독일어때문에 또 비슷한 하루를 보내버렸네.


우짜든둥

아무것도 억울할 것 없고 아무도 원망스러울 것도 없는, 덕분에 스스로에게는 너무 관대해진 사야가 만으로 마흔아홉이 되었다

자기합리화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야는 아직 만오십이 되기엔 일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 남았다고 아직 사야에게 기회는 충분하다고 자기암시를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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