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만의 공간

그래도 아름다운 날들

史野 2012. 4. 20. 12:14

예전에 장미희가 어디선가 그랬다지? 아름다운 밤이예요..ㅎㅎ

 

어제가 사야에게 아름다운 밤이었다.

 

송현님과 지난번에 서실에서 만났었다는, 독일에 계셨다는 그 남자분이랑 술을 마셨다

 

목요일은 사야가 인사동에가서 송현님께 서예를 배우는 날. 그게 벌써 한달이 되었다.

 

 

 

왠만하면 인사동까지 걸어가는 길. 대충 한시간 반이 걸리는데 아주 자연스런 모습은 아니지만 이 무질서하고 정신없는 서울에서 이런 길이나마 걸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할 일. 이런 저런 생각으로 걷다가 마주한 모습. 세상엔 참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 순간이 많지 않을까 싶을만큼 감동적이었는데 사진엔 제대로 그 감정이 반영되지 않아 안타깝다.

 

우짜든둥 이야기했듯이 서예를 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송현님의 강권에 못이겨 시작을 했고 또 송현님의 가르치는 방식이 아주 특이해서 한달내내 글씨라고는 써본 적도 없는 날들..^^;;

 

근데 뭘 가르치시고 싶어하는 걸 잘 알았기에 나름 열심히 했고 아 이 정말 열받도록 재수없는 사야는 왜이렇게 못하는 게 없는 건 지 너무나 잘한다고 난리시니 이건 뭐 잘못하단 수제자로 등극하게 생겼다..ㅎㅎ

 

각설하고 어제는 그래서 사야가 드디어 글씨를 쓰기 시작한 날. 역시나 특이하시게도 전서 그러니까 상형문자부터 가르치시던데 처음엔 그런 글자는 안쓴다고 길길이 뛰었던 사야지만 막상 배우기로 한 후야 스승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게 기본자세. 글씨인 지 그림인 지 알 길없는 그 글자들에게 한동안은 올인해 볼 생각이다.

중간에 그만두건 어쩌건 전서로 반야심경을 쓸 수 있는 수준까진 만들어주신다니 기대해봐야겠다..ㅎㅎ

 

기초과정을 마치고 처음으로 글자를 시작한 날이기도 하고 지난 주에 오셨던 저 남자분이 또 나타나시기도(?) 했고 셋이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시러 갔다.

워낙 재수없는 사야야 나이가 그리 중요한 사람은 아니다만 송현님은 사야보다 정확히 열살이 많으시고 저 남자분은 대충 스무살은 더 많으신 것 같다.

어찌보면 전혀 조합이 맞지 않을 거 같은 세 사람이 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지난 주에도 느꼈지만 의외로 이야기가 잘 통하더라는 거다.

물론 셋다 아주 특이한(?) 인간들이란 공통점도 있지만..ㅎㅎ 독일인들을 빼놓고 저리 겸손하신 분들도 참 드물더라는 것.

나이가 들어갈 수록 남의 이야길 잘 안듣고 자기 인생을 풀어놓기가 십상인데 저 두 분은 사야가 열을 내며 이야기하는 것도 잘 들어주시고 이런 태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대들어도,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긍정도 해주시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모를 정도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독일에서야 당근 나이랑 상관없이 쓰는 언어도 같고 또 독일뿐 아니라 예전에 사야의 그녀와 고기공놈 나까지 셋이 거의 이십년 가까이 차이나는 사람들과도 잘 섞여 살던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친구들도 아닌데 두 분앞에서 혼자 담배 팍팍 피워대며 이런 저런 이야길 하는 게 묘하게 자연스럽고 좋은 시간이었다지.

 

아니 사실 어제 가장 아름다왔던 일은 저 남자분이 아니 저 분을 나는 정선생님이라고 부르는데(아 그러고보니 그녀도 나는 정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그 분이 내게 보여준 이 메일때문이다.

저 분은 한국에선 심리학을 전공하고 프랑스로 박사를 하러 가셨다가 어찌 독일에서 철학으로 학위를 따셨다는 분인데 처음 지도교수와 견해차이로 엄청 싸우셨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은 그 분과 결별할 수 밖에 없었다는데..

 

구구절절 자세한 내용이야 모르지만 어쨌든 한달 전인가 그 지도교수가 보냈다는 메일을 어제 어떤 이야기속에 연관이 되어 내가 읽게 되었다.

나야 뭐 그 쪽을 잘 모르긴해도 나름 독일에서 책도 여러권 쓰고 했다는 여든이 넘은 한 노학자가, 어찌보면 그냥도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그런 한 인간이, 전립선 암(이건 내가 모르는 단어라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에 걸려 삶을 관조하는 과정

그리 긴 메일은 아니었지만, 저 정선생님의 논문 (그러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교수밑에서 쓴 논문)을 앞에 놓고 메일을 쓰고 있다며 당시의 상황과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이었을까 등등을 아주 담담한 어조로 써보냈는데 찡하고 짠하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웠던 그런 기분.

 

아니 무엇보다 아 이 인간은 이런 순간에도 자신의 실수와 부족한 점을 생각해내는 참 멋진 인간이구나, 라는 감동?

아주 오래전 어느 동양인 학생과의 의견차이를 기억해내고는 나는 그때 그걸 이해할 수 없었노라고 그게 내 한계였다는 고백일까 회한이랄까를 듣는데 스무줄 정도의 메일이었지만 이백페이지도 넘는 그림이 머리를 마구 스쳐지나가더라는 거다.

아 이 인간은 정말 자기 인생을 진실되게 살았고 끝까지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성실하구나. 저렇게 나이들어간다는 건 정말 쉽지않은 일인데....

위에도 썼지만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아 세상엔 정말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란 위안이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독일어가 가능해 그 메일을 이해할 수 있었단 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 지.

 

거기다 송현님이 내 팬(?)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리 광(!)팬이신 줄은 또 내가 미처 몰랐다..ㅎㅎ 저 정선생님께 사야란 인간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당신께 어떤 의미인지를 열심히 설명하시는데, (뭐 그 정도 연세면 누가 설명안해도 말 몇마디 해보고도 알만한 연륜이다만..^^;;)   

아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저런 의미있을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 이 잘난척하는 사야도 좀 놀랬다.

 

위에도 썼듯이 나 고기공놈 그녀 그 셋도 만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그런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다만 그리고 여기 글을 남기는 늘봄언니도 송현님과 동갑 그 남편분은 나랑 정확히 이십년 차이,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열린 사람들을 여러번 만나보긴 했다만 온라인에서 만나 오프로 이어지고 그  지인까지 나이를 떠나 이런 저런 이야길 토론하고 귀기울여 들어주시는 분들을 만난다는 건 행복한 일임에 분명하다.

 

감히 내 수준에 읽을 수는 없지만 그 노학자가 앞에놓고 메일을 쓴다는 저 분의 논문을 다가오는 내 생일에 선물로 받기로 했다. 아 물론 사야 성격상 ' 저 그거 못 읽어요 그래도 소장만은 하고 싶어요" 솔직히 말씀도 드렸다..ㅎㅎ

 

 

 

지난 번 올린 글때문에 걱정하시는 분들 많은데 사야 괜찮다.

지난 글에 올린 꿈이야기중 사야가 입었던 옷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그리라고 하면 그릴 수 있을만큼 정확히 기억나는 심플하면서도 아주 멋지고 어찌보면 서양의 칵테일 드레스 같기도 한 퓨전스타일이면서 촉감도 좋고, 내 몸에 꼭 맞고. 입고 있는 내가 자랑스러울만큼 예쁜 한복이었다.

울 선생님 생각나는대로 그 옷과 그때의 느낌을 잘 묘사해보라고 하시더니 다 듣고는 하시는 말씀.

그 옷이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동서양이 잘 조화된 심플하고 멋진 인간, 거기다 왜 그 옷이 하필 한복이었냐며 한국에 잘 돌아온 것 같다고 웃으시더라.

세상에 그만한 위로가 없을거다. 내가 입었던 그 멋진 옷이 나 자신을 표현하는 거라니..

그게 정확한 정신분석이건 선생님이 나를 위로할려고 한 말이건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않다. 인간에게 중요한 건 그 말을 들었다는 그 자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신뢰는 한 인간을 구원한다지.

 

 

 

어쨌든 백만원이나 되는 안락의자는 사면서 삼십만원 조금 넘는 밥솥은 못사는 건 그저 인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야는 꼭 밥 그러니까 쌀로 만든 밥을 먹어야하는 인간도 아니다. 십오년을 쌀 안 먹고도 잘만 살았는데 그게 뭐 중요하겠냐고..ㅎㅎ

 

사실 내가 남친에게 반찬을 해다줘야하는 입장인데 남친이 다니는 회사영향으로 내가 이번에 남친에게 반찬을 잔뜩 얻어왔다. 음식재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야에겐 좀 웃기는 상황이긴 하다만 우짜든둥 반찬이 생겼으니 밥을 해먹게 되었다지..

 

 

 

이 밥 온갖 잡곡이 다 들어간 것도 모자라 톳까지 들어간, 거기다 돌솥에 지었으니 진짜 돌솥 영양밥인데 워낙 작은 양을 하다보니 거의 누룽지 수준이 되어있더라는거다. 돌솥이니 가스를 껐어도 열이 남아있어 물 좀 더 부었더니 그나마 저 정도.

 

기억하시는 분들 있을 지 모르겠지만 처음에 한국왔을 때도 전기밥솥없이 돌솥에 해먹었는데 전기레인지랑 가스레인지랑은 정말 달라 불조절이 너무 힘들다는 것.

 

 

 

사야가 잘 해먹는 음식중 하나. 달걀 두개에 집에 있는 재료 섞어 만드는 스크램블에그다. 정확히 뭐가 도움이 되는 지 지금은 잘 기억 안나지만 어쨌든 토마토는 익혀먹는 게 더 영양이 많고 마구 섞어주기만 하면 되니 급히 먹고나가야할 아침이나 많이 먹으면 부담스런 저녁식사로 손색이 없는 음식이란 생각이다.

 

 

 

어느 분께서 썩히기 아까운 감각이라고 인테리어쪽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신 사야방의 한쪽 전경이다..ㅎㅎ

 

어제도 두 분과 그런 이야길 했었는데 아무리 정신과를 다녀도 당신은 멀쩡한 인간 맞는데요? 란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정신과를 들락거리며 그게 수면제던 불안치료제던 먹어야하는 이유,  

남들보다 훨 예민한 신경줄을 타고난 사야가 지금 힘겹게 힘겹게 삶을 버텨내고 있는 그 공간이다.

사야에겐 지금 참 사치스런 공간이기도 하다만 또 그런 사야를 잘 버텨내게하는 나름의 은신처이기도 하고 말이다.

술담배 좀 줄이고 운동만 다시 시작하면  정말 환상일텐데 아직은 사야가 마음 복잡한 일들도 너무 많고 작년에 하다만 어마어마한 치과치료까지 조만간 감행을 해야해서 그게 쉽지가 않다.

의사를 잘못만나 치료과정이 트라우마가 되어버렸다. 어차피 다른 의사에게 갈 거긴해도 전신마취를 하고 치료받아야하나 고민할 정도..작년엔 정말 지퍼올리는 소리만 들어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았었다..ㅜㅜ

 

 

 

철마다 꼭 사는 샤피니아라는 화분을 들이고 싶었는데 내가 놓고싶은 곳이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이라 실패하면 거금 삼만원을 날리게 될판.  그 개량종이라는 저게 저렴하기도 해서 시험삼아 샀는데 화사하긴 하다만 바라보고 있자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여주 마당에 가져다 심어야할 듯.

 

정말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벌써 목련꽃은 다 떨어져 잎이 나고 있고 라일락도 피기시작하고 조팝나무꽃이며 죽단화며 청계천만 나가도 가슴벅찬 날들이다만 그래도 사야에게 위로가되는 건 사람, 아 이 아름다운 계절에 간절히 가슴벅찬 연애가 하고 싶다..^^

 

 

 

 

2012.04. 20.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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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내려달라는 송현님의 강력한 요청에 내립니다. 다시 보시는 분들 의아해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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