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79년 그 어느 날

史野 2005. 3. 21. 00:28

 



Degas.ambassadeurs

 


그러니까 박통이 살아있던 시절

 

영화제목처럼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사람의 먼 옛날 일이다.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우리가족이 문화행사를 같이 간다는 건 꿈도 못꾸던 때.

 

단 한번도 음악회나 연극같은 걸 봐본적이 없는 나는 초등6학년때 내 인생을 내가 개척하기로 마음먹는다..ㅎㅎ

 

윤복희씨가 주연을 한 뮤지컬 피터팬.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 내가 받던 용돈은 월간잡지를 한 권 살 수 있던 금액이었고 또 그러라고 받는 돈이었는데 어떻게든지 그 공연을 봐야겠던 나.

 

그때 집에 놀러온 사촌오빠가 내 고민을 듣더니 마침 과외월급을 받은 날이었다고 잡지와 공연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돈을 내게 주었다.

 

한마디로 대박이 터졌던 것이다..ㅎㅎ

 

친구들중에 그런 표값이 문제가 안되는 넉넉한 집애들도 꽤 있었는데 왜 내가 혼자 그곳을 가게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쨋든 나는 부푼마음으로 나름대로는 최대한 멋까지 내고 그 곳에 혼자 갔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게 잘풀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거대한 세종문화회관 앞에 도착한 나를 기다린건 매진이라는 푯말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공연이라는 걸 보러가는 내가 예매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너무나 암담해서 그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넋을 놓고 있던 나.

 

당시는 또 부자들은 자가 운전이 아니라 거의 운전수를 두고 있을때라 검은 차에서 내린 엄마와 애들은 줄줄히 공연장으로 들어가고..ㅜㅜ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ㅎㅎ

 

그때 엄마랑 같이 와서 나같이 표가 없던 애들도 꽤 있었는데 그 엄마들이 주장해서였는지 아님 관리아저씨의 판단이었는지 한 아저씨에게 돈을 내자 모두 들여보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내 생애 최초의 뮤지컬을 세종문화회관 일층 통로바닥에서 구경하게 된다.

 



 

Paul Gauguin. The Cellist (Portrait of Upaupa Scheklud). 1894. Oil on canvas. Baltimore Museum of Art, Baltimore, MD, USA.

 

 

 

얼마전 한국에도 갔던 비스펠베이가 동경에서 몇 번의 연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요즘 넋을 놓고 살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하나는 지나가고 지난 목요일밤에 또 하나.

 

당일에 표가 있을지도 모르고 멀지는 않으나 내가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홀이라 포기를하고 있다가 바람소리도 살벌해지던 저녁 여섯시 뭐에 홀렸는지 벌떡 일어나 나갔다..ㅎㅎ

 

다행히 표는 있었고  남편에게 음악회를 보러왔노라 전화를 하곤 시간이 좀 남아 적포도주 한 잔 사 로비구석에 앉았다.

 

그때 계단에 주저앉아있던 그 아이가, 공연장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공연을 보며 열광하던 그 아이가 갑자기 떠올랐다.

 

 

 

26년이 지난 지금 이 낯선 도시에서 또 이렇게 헐레벌떡 남은 표를 사고 구석에 혼자 앉아  있구나

아 이 바람부는 날 나를 이 곳으로 불러낸 건 너였구나.

그렇게 바닥에 앉아 공연을 감상하면서도 행복했다고

그리고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구나.

너는 그렇게 씩씩하게 네 인생을 잘 살았는데  나는 이렇게 길잃고 헤매며 자기연민에나  빠져있으니.

너는 내가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거구나.

오렌지 쥬스 한잔 건네며 계단위의 네 어깨를 감싸주고 싶다.

 

 

 

그렇게 그 아이와 함께 달뜬 기분으로 연주를 들어서였을까

 

익숙한 바흐의 무반주첼로모음곡이었는데도 그 날 들었던 연주는 뭔가 달랐다.

음색도 달랐고 새로운 곡을 듣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

 

내일 그가 하이든과 드보르작의 첼로협주곡을 연주한다기에 표를 구입하고 기대하고 있었더만 남편은 일이 밀려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을것 같단다.

 

속상해지려는 마음을 바꿔먹으며 다짐한다.

 

그래 나라도 씩씩하게 즐기며 잘 살자고..ㅎㅎ

 

 

 

 

 

2005.03.20 東京에서...사야

 

 


wispelwey

'먼지 묻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편의 저녁식사  (0) 2005.05.30
남편과 전화 그리고 시어머니.  (0) 2005.05.05
독백형식의 답장  (0) 2005.03.15
아름다운 친구  (0) 2005.02.25
미국에서 온 뜻밖의 전화.  (0) 2005.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