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망 좋은 방

황당한 중년의 연애

史野 2008. 1. 29. 15:29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는 둘다 결혼한 적이 있으며 아이가 없고 현재는 경제적 능력도 없다.

 

그래서인지 둘 다 마흔이 넘었는데 연애하는 모습은 스무살때랑 다를 바가 없다.

 

그 사람은 참 따뜻하다. 만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꼭 십년 아니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익숙하고 편안해서 나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무척 신기해 한다.

 

심지어 고기공놈마저도 그 사람앞에선 내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 더 편안해하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 놈을 우리꼬마라고 부르며 친동생처럼 이뻐라한다. 

 

얼마전부터 자꾸 전생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지만 그를 만나고 나선 정말 전생의 인연이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 정도로...

 

그는 누구보다 더 많이 나를 알고 이해해줄뿐 아니라 내 생각도 정확히 읽어내곤 한다. 물론 그래서 빠른 시간안에 가까와 진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삶에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지 가끔은 놀랍기도 하다.

 

식성도 비슷해서 별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는 내 음식을 그게 냉이된장국이건 만두국이건 스테이크건 정말 맛있다고 감탄하며 행복해한다.

 

서점에 들어가 각자 고른 책을 슬그머니 바꿔 서로에게 선물하고 상대가 고른 책을 서로 읽고 싶다는 사실도 마냥 즐겁다. 

 

그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독일가수의 노래를 처음 듣는데도 열광하거나 그는 좋아라하지만 내게 익숙하지 않은 전자기타로 연주되는 클래식편곡에 나는 또 열광한다.

 

전자기타가 취미인 그는 낙원상가 기타가게를 돌며 장난감가게앞의 사내아이처럼 즐거워하고 내게 꼭 들려주고 싶은 곡이 있으니 열심히 연습하겠다거나 집앞의 감나무를 찍어보내며 직접 따서 주겠다는 낭만적인 약속을 하기도 한다.

 

둘 다 술은 좋아해도 소주마시는 걸 싫어하고 밤하늘의 별바라보기나 빗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감성.

 

언젠가 꼭 통나무집을 지어 진공관 앰프를 설치해놓고 386세대가 열광하던 가요를 LP판으로 들으며 맥주를 마시자는 남자.

 

노래방에 가면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l world를 누구보다 멋지게 부를 수 있는 남자.

 

황당하게 어머니께 나를 소개시켜놓은 것도 모자라 어머니곁에서 잠까지 자게 만들고는 다음 날 어머니랑 목욕탕(!)에 가서 어머니 등이라도 좀 밀어드리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무대뽀인 남자 그러나 밉지 않은 남자.

 

성대앞 허름한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갑자기 건네받은 전화기에 대고, 어머니 저희 지금 고기구워먹고 있구요 조금있다가 뮤지컬보러갈거예요 어쩌고 재잘대는 내게 궁금한 것도 많으시련만 그저 함께 즐거워해주시는 그의 어머니.. 

 

세번째 만나 생전 보지도 못한 그의 어머니옆에서 잠을 자고 깨어나 어디론가 사라진 그 사람을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나이가 적지도 않은 아들이 역시 적지 않은 나이의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 집에 재우기까지 하는데 별 말 없이 그저 편안히 대해주시던 특이하신 분.

 

사방에 눈이 가득한 곳, 어머님 옷을 주워입고는 겨울햇살이 따뜻한 툇마루에서 두 여자가 한 남자를 기다리며 처마밑 낙숫물 소리를 들을때 그 느낌이 그 황당한 상황에서도 왜그렇게 좋던지.

 

몸배차림의 두 여자가 자신을 마중나와 서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뇌리에 박혔다고 그가 그랬던가. 

 

오늘은 우리가 만난 지 정확히 한 달이 되는 날. 이건 무슨 소설도 아니고 한달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난건지 때론 신기하고 때론 겁도 난다.

 

종로를 걷다 이 자리에 나 고딩때 롯데리아가 있었는데 자주 갔었다니 그 역시 그때 자주 갔었다고 하고 대학로에선 또 저쪽으로 가면 내가 자주 가는 맥주집이 있다니 자기도 그 쪽 비어할레(!)에 자주 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예전에도 여러번 스쳤을 지도 모른단 생각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길거리에서 호떡이나 솜사탕을 사먹기도 하고  방바닥에 배깔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전자기타로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는 걸 감상하다보면 내 우울했던 십대를 새롭게 다시 사는 느낌.  

 

장거리연애를 하는 지라 밤마다 전화통을 붙잡고 몇 시간씩 수다를 떨고 메일이 아닌 편지를 쓰라고 강요(?)하는 남자랑 마흔두살의 사야는 지금 열일곱살의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열일곱살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많이 고통스럽고 또 많이 행복한 그런 어지러운 날들이다...

 

 

 

 

2008.01.29.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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