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망 좋은 방

저주받은 人生

史野 2007. 11. 2. 16:01

어제 술 만땅 취해서 글 올렸지만 드디어 엄마에게 내가 왜 서울에 왔는 지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했다.

 

원래 정면충돌을 할려고 왔는데 식구들도 말리고, 아 말린다고 말 들을 나는 아니다만 혹 내가 진실을 이야기하면 엄마가 다른 식구들을 괴롭힐까봐 참았다.

 

그런데 내 엄마 요즘도 여전히 개판을 치는데다 올케언니도 너무 괴롭고 울 신랑 온다고 했다가 안 온다니 여태 참았던 것을 (참견하고 싶어 미치는데 내가 나 건드리면 안 돌아갈거라고 엄포를 놨었다) 지난 금요일에 쏟아내고 난리가 아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 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나는 안되겠다 결심하고 어제 드디어 이야기한거다.

 

내가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왜 그러니? 무슨 일 있니,라고 물어봤다면 엄마의 모든 죄를 용서해줄려고 했다. 아니 그래도 설마하며 아직도 엄마를 믿었다.

 

제발 단 한마디만이라도 내게 관심을 쏟았다면..

 

너를 위해서라면 뼈가 가루가 되어도 좋다는 내 엄마는 당장 오빠창피스럽게가 답이다. 아니 집안망신이다.

 

단한번도 너 그렇게 떠도느라 얼마나 힘드니 소리를 해본 적이 없는 내 엄마. 어쩌다 안부전화라도 하면 진짜 외로운 딸에게 엄마 외롭다고 징징대기나 하는 내 엄마.

 

그래 그런데 나는 도대체 뭘 믿었다는 말인가.

 

어제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냥 넘어가면 우리 엄마가 아니다. 오늘 아침 당장 울리는 전화. 전화를 받다가 나도 드디어 폭발을 하고 말았다. 내 속에 그런 분노가 숨어있는 지 내가 놀랬을 정도.

 

전화를 거칠게 끊어놓고도 그 분을 참지를 못해서 어제 산행으로 쑤시는 몸을 이끌고 달리기를 나갔다. 만약 몇 일전처럼 누군가 내게 쓸데없는 말이라도 시켰다면 아마 들고 있던 아령으로 머리통이라도 갈겼을거다.

 

아니 내 머리통을 전신주에 짖찧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엄마가 미워서? 아니 그런 여자가 내 엄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의 딸이라는 변할 수 없는 그 사실이 혐오스러워 미치는 줄 알았으니까.

 

나를 세상에 내놓았으면서 단 한 번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 여자.

 

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을 수가 있었겠는가.

 

내 엄마가 내 약한 맘을 이용해 먹는데 누가 나를 이용한다고 욕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인생을 포기했더랬다. 아니 될대로 되라고 놓은 적이 있었더랬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엄마에게 절규했더랬다.

 

최초의 기억. 여섯살난 아이였던 나는 외숙모가 데리고 온 외숙모조카가 한 잘못때문에 길거리에서 죽도록 맞았다. 내 잘못도 아니었는데 사돈조카를 팰 수는 없었던 내 엄마는 그 어린 나를 복날 개패듯 그것도 길거리에서 반 죽였다.

 

남들은 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그렇게 변한줄 알지만 아니라니까. 정말 고2때 쓰러질 때까지 줏어온 딸도 이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싶을 만큼 학대받고 살았다.

 

초등학교때도 내 몸뚱이만한 짐꾸러미를 들고 방산시장으로 남대문시장으로 늘 심부름을 다녔고 그랬다고 칭찬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

 

도대체 공부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고, 우리 아빠 우리 막내딸은 하도 잘 웃어서 쳐다만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다고 하셨을 정도인데 그런 내가 왜그렇게 미웠을까. 왜 죽일만큼 그렇게 때리고 싶었을까.

 

철이들고야 알았다. 그게 아빠가 떠도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는 걸.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 나이 만으로 겨우 마흔네살이었다는 걸.

 

그래서 엄마를 용서했다. 그래 완벽한 인간이란 없는 법이니까하고 말이다.

 

나름 극복하려고 무진장 애썼다.

 

여기 남자친구도 들어오지만 그때 정신병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그 친구 무진장 말렸다. 하긴 실려가는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감금이 되겠다는 데 누군들 안말렸겠냐만 그것도 내겐 나를 어떻게 컨트롤해보려는 발악이었다.

 

그때도 썼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엄마가 일을 한것도 아니니까 엄마가 나를 키운 것도 아닌데, 형제들에게 빌붙어 큰 거나 마찬가지인데, 죽어도 대학은 못 보낸다는 걸 공부 잘했으니 그나마 서울교대 장학금받아서 들어간건데, 우리 오빠 지금 나를 그때 서울교대를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하고 당시 친구들도 그 점수로 왜 거길 가냐고 말렸지만 내가 단 한 번도 다른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건 그거나마 나는 고마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엄마덕에 자란 것처럼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고 잘난척해도 참았다.

 

그래도 엄마니까. 내가 엄마보다 교육을 더 받았고 엄마보다 오래살거니까..

 

그런데 참 교묘하고 악랄하게도 엄마는 끝도없이 나를 괴롭히고 이용해먹고 상처주고..

 

국제결혼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만난 인연. 내가 신랑과 결혼해서 단 한 명 내가 양공주인가 왜이렇게 내게 바라는 게 많은 지 비참하게 만든 것도 우리 엄마다.

 

친정을 살리라니 우리오빠 연봉이 얼마인데 친정이 죽어가냐? 우리오빠는 뼈빠지게 일하고 울 신랑은 어디 땅바닥에 떨어진 금덩이 줏고 다닌다냐? 젠장 좀 잘해드리면 내 딸이 잘났으니 당연하단다.

 

불면증에 정신병에 예민한 딸내미 그나마 좋은 남편 좋은 시댁식구들 만나 잘살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도대체 뭐 그리 바라는 게 많은데?

 

어젠 정말 너무 힘이 들어서 시어머니랑 통화하다가 또 막 울었다. 몇 일전 아버님기일이었는데 그것도 까먹고 어머님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님은 또 왜그렇게 뵙고 싶던지..

 

상해마지막해 내가 드디어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니 당시 증권에 미쳐 내게 한푼이라도 뜯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있던 우리 엄마 지금와서 애는 뭐하러 낳냐고 그냥 둘이 행복하게 살으라고 했더랬다.

 

다른 엄마같으면 시집가서 애도 못 낳는 딸 엄마가 병원에 끌고가서 약이라도 해줬을거다. 내가 도쿄가서 이젠 정말 아이를 낳으려다가 시험관아기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아 상처받고 아이를 포기했는데

 

작년 봄 우리 엄마 내가 서울에 왔다 사람들만나고 두시인가 들어와 화장을 지우는데 그 나이가 되어 애 하나 못 낳고 술이나 먹고 다니며 인생을 왜그렇게 불쌍하게 사냐고 했다.

 

내 남자처럼 남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내가 올해 이젠 집에서 묵지 않을 거라니까 너희 엄마는 나쁜 사람이라고 왜 여태 그 관계가 끝나지 않은 건지 신기하다며 잘 결정했다고 했더랬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엄마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거라고 이를 악물었더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엄마를 너무 많이 닮아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며 절망했더랬다.

 

그런데 이년전 한국에 왔던 신랑이 이모네집에 엄마랑 인사를 갔다 나오다가 너랑 너희 엄마는 어쩜 그렇게 다른 지 꼭 별 세계에서 온 사람같다, 고 했다.

 

신랑은 무심결에 한 이야기지만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태어나서 들어본 가장 큰 위로였다.

 

나 이제 이 질긴 인연의 끈을 놓는다.

 

우리 엄마 내게 너는 엄마죽어도 울지 말라고 엄마에게 할만큼 했다는 말을 백번했다.

 

엄마야 빈말이었겠지만 그러니까 계속 또 나를 괴롭혔겠지만 나는 이제 그 말을 진심으로 들으련다.

 

이게 전생의 업보라고 해도 그래 나 할만큼 했다.

 

 

당신,

 

어쨌든 고맙다. 나를 지우지 않고 세상에 내어놓아줘서..

 

나는 고통스러워도 삶을 사랑하니까

 

아무리 이래도 인생을 포기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을거니까..

 

나는 또 이를 악물고

 

당신과는 다른 멋진 늙은이가 될거야

 

그게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야.

 

 

 

 

2007.11.02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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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글은 이렇게 올렸지만 저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마시길 바래요

 

오늘 아침 친구랑 통화하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인생 그지같은 거 어디 저하나 뿐이냐구요.

 

중2때부터 상냥하고 친절한 엄마만 기억하는 친구는

 

이제 저를 이해합니다.

 

후련합니다.

 

식구들이 걱정되지만 이젠 그 걱정도 그만 접을랍니다.

 

여행을 갑니다.

 

이렇게 떠나는 여행도 한 두번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야 기껏 집나왔다 이 옆 공원에서 하염없이 앉아있다 들어가긴 했어도

 

한국을 떠나기전에도 자주 이랬어요

 

미칠 것 같은 때 훌쩍 떠났다가 기운을 내고 돌아오곤 했답니다.

 

카메라가 고장이라 좋은 사진을 담아오진 못하겠지만

 

이 곳 저 곳 떠돌면서 마음을 추스리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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