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서초동에서..

史野 2007. 8. 25. 21:47

 

 

내가 지금 잠시 묵고 있는 곳은 서초동이다.

 

일부러 이 곳으로 온 건 아니고 급하게 방을 구하다보니 그렇게 된거긴 해도 친구가 이 곳에 오피스텔이 많다고 해서 한 번 동네분위기도 볼겸 구했다.

 

나는 강북출신이라 강북이 편하지만 어쩌면 또 새 출발이고 하니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싶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오피스텔은 강북이나 강남이나 가격차이가 없다는 것도 솔깃했고 말이다.

 

그러나 서초동은 내게 낯선 동네가 아니다.

 

나는 서초동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학교앞 화실에서도 어마어마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 건물은 그대로에 그때도 있던 사진관은 내가 사진을 맡기곤 하던 그 모습 그대로더라)

 

오늘 이 곳 오피스텔을 알아볼까하는 마음에 길을 나섰다가 졸업하고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일년 휴학을 했었으니까 총 오년이나 다닌 학교..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적응을 못해 휴학까지 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학교였기에 큰 애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16년 반만에 발을 들여놓으니 기분이 묘했다.

 

서클실이야 옮겨갔지만 서클실 앞의 정원은 그대로인데다 내가 살다시피하던 회화실이며...

 

회화실문은 잠겨있었고 그 앞 분수는 사라졌지만 계단을 올라가며 도대체 내가 이 계단을 얼마나 많이 오르락 내리락 했었는지 하던 생각.

 

지도교수님방은 다른 이름으로 교체되었지만 졸업작품을 당신스타일로 그리지 않는다고 날이면 날마다 나를 구박하는 게 취미셨던, 그래 과애들이 언니를 특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라고..-_- 위로하던 그 교수님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자가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당연히 먹고살 문제다.

 

내가 신랑이랑 헤어지기로 결심한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이제는 내가 나를 먹여살릴 능력이 없다는 그 위기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신랑이 하자는 대로 해야하고 가자는 대로 가야하고 돈버는 그를 무조건 지원해 줘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남자야 내가 버는 돈은 우리가 버는 돈이라는 사람이지만 돈번다고 유세하는 남자랑 살았다면 참 서러웠겠다 싶은 위치.

 

이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내 위기의식에 대해 그녀는 내게 경제적인 문제는 걱정하지말라고 나이제한 없어졌고 당신 머리 좋으니 다시 시험봐서 학교로 돌아오면 된다는 멜을 보냈더랬다.

 

아주 오래전에 쓴 적이 있지만 나는 초등학교에서 이년을 근무했더랬다. 그러니까 내가 밥벌어 먹고사는 기술(?)은 선생질이다.

 

물론 이년중 일년반을 미술만 전담하고 담임은 겨우 육개월 경력이 전부니 제대로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고 볼 수도 없지만 어쨌든 그 대학을 나오고 학교라는 곳에 몸을 담았었다.

 

오리엔테이션부터 그렇게 놀아놓고(?) 어떻게 이 대학을 들어왔냐며 날라리로 찍혔을 만큼 나랑 맞지 않던 대학. 휴학을 했다 복학을 하고 결국은 학점은 개판이었고 죽어라 그림이나 그리며 버티던 대학생활.

 

휴학을 했던 덕에 피해갈 수 있었던 임용고시 일호가 되어 어찌 어찌 갔던 학교에도 역시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초반에 신랑이랑 알게 되었고 학교를 벗어나겠다고 대학원 준비를 하는데 대학원을 가지말고 독일로 유학을 오라고 신랑은 입학원서까지 보내주며 꼬셨고 우리는 어찌 결혼을 하여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독일로 떠났다.

 

당시 한 동료선생님은 내가 학교에 잘 적응했다면 국제결혼같은건 (당시 국제결혼은 지금과 달리 최악의 선택이란 분위기였다) 하지 않았을거라고 했을만큼 힘들었던 학교생활

 

나는 가르치는 건 좋았더랬고 그리 나쁘지 않은 선생이었지만 내 직업자체보다 학교라는 그 사회를 견뎌낼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이제 14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먹고살 걱정을 하며 나를 선생이 되게했던 그 대학 교정에 앉았으니 어찌 머리가 복잡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내가 더블린에서 유치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내 경력이 도움이 되긴 했었지만 그래도 외국에서는 아무 쓸데없었던 내 전공.

 

내가 독일에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며 고생할때 신랑은 그러게 차라리 한국에서 수학같은 걸 전공하지 그랬냐며 놀렸더랬다.

 

물론 나는 지금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같은 건 없다.

 

어제 만난 그녀는 완전히 돌아오진 않더라도 기간제교사같은 건 늘 자리가 있다는 말을 하던데 오늘 오빠왈 늘 첫 출발이 중요하다고 그냥 시도해볼려고 했는데 눌러앉았다는 사람 여럿 봤다고 정말 원하는 일인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더라. 일리있는 말이다.

 

어쨌든 떠도느라 대학교때 그 교정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그러던 그 친구들과는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살지 않지만 기억이라는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아 그래 우리가 저기서 뭘했었지 하는 이십년 가까운 세월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무작위로 떠오르던 학교방문.

 

그리고 나란 인간이 배운 도둑질이 과연 이 것이었나 싶기도 했던 날.

 

어쨌든 그 날 그러니까 오늘

 

나는 일단은 내가 일년을 살 집을 구했다.

 

식구들은 어쨌든 가까운 곳에 살기를 바라고 그제 봤던 마음에 들었던 오피스텔이 월세가 좀 비싸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보고 결정할까 싶었는데 그 사이 나가버렸다나.

 

그래 나는 이번에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집이 나갔다니 어찌나 황당하던지.

 

떠돌면서 집구한다고 내가 본 아파트가 도대체 몇 개인가. 그래 딱 보면 알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고 생각했기에 다시 한 번만 더 보고 당장 계약을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다른 집이라도 알아봐야하니 부동산에 그래도 갔는데 그 집과 내가 인연이었는 지 막상 계약자가 월세를 조금도 깍아주지 않는다는 것때문에 포기를 했다는 즐거운(?) 소식 

 

다시 한 번 본 집은 역시나 내 느낌이 맞았고 당장 계약을 했다.

 

비어있는 집이라 여기 머물고 있는 곳의 날짜가 끝나는 29일에 들어가기로 했다.

 

제일 중요한 게 집을 구하는 문제인데 그 문제가 해결이 되니 아 출발 좋다란 기분.

 

14년동안 그렇게나 한국을 들락거렸는데도 막상 살 생각으로 돌아온 한국은 새롭다.

 

오빠도 14년 전에 네가 알던 한국이랑은 다르다고 그러니 고정관념이나 편견같은 걸 버리고 비싼 수업료낸다는 심정으로 새롭게 보기를 하라던데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그 14년의 공백은 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년계약이긴 하지만 내가 내 이름으로 뭔가를 계약하는 첫 출발.

 

사십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온전히 혼자 살 게 될 그 집을 구한 날..

 

친정옆에 집을 구하며 엄마와도 정면대결(?)을 하기로 마음먹은 날..

 

내 결정이 나를 어디로 이끌 지 아니 내가 그 결정을 어떤 방향으로 만들지 생각이 많아지는 밤

 

이렇게 내 삶의 새 장이 열리고 있다...

 

 

 

2007.08.25. 서울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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