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주가 넘는 긴 여행을 마쳤습니다만 저는 곧 십삼년 십개월의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당장 이혼을 하는 건 아니지만 헤어지는 건 맞습니다.
제 글을 꼼꼼히 읽으신 분들중 짐작하신 분들도 계실거고 전혀 뜻밖인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너무나 힘이 들었고 저 자신도 제가 남편과 헤어질 수 있으리라 믿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9년 전에 신랑에게 이혼해달라고 한 적이 있고 다시는 제 입으로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더랬죠.
남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더이상 견딜 수가 없네요.
어떤 경우에도 신랑은 저에게 먼저 헤어지잔 말을 할 사람이 아니기에 또 제가 먼저 꺼냈습니다. 신랑 생일날 술이 만땅 취해서는 조목조목 했다는 이야기는 저희가 헤어져야할 이유였습니다.
마흔을 오랫동안 앓았고 제 미래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니 무서웠습니다.
이 떠도는 인생. 여태는 잘 해왔지만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작년에 그렇게 독일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 지도 모릅니다. 당시 썼었지만 신랑은 아주 심각하게 꼭 독일로 돌아가야겠냐고 물었고 생각해보니 제가 독일사람도 아닌데 왜 꼭 독일로 돌아가야하나 싶었습니다.
나는 한국인이고 사실 내가 돌아가야할 곳은 한국이 아닐까하는요..
그러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시댁이랑 문제도 생기고 그 땅이 내가 늙어가야할 땅인가 싶은게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도 저희부부는 서로 노력하며 관계를 만들어온 참 멋진 파트너이고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하긴 힘들었기에 그와 헤어진다는 생각은 못했더랬죠.
물론 지금 이렇게 결정을 했으면서도 자신은 없습니다만 지난 번 그 브라질건이 터진후 갑자기 제 삶의 끈이 툭 끊겨버린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망망한 바다에 그냥 내던져진 기분이었달까요.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제 미래. 남편이야 어디를 가나 일을 하지만 그게 과연 제 삶인가 싶더군요. 아이가 있었다면 달랐겠죠. 그런데 더이상 이렇게 살 자신이 없어졌고 그렇다면 더 늦기전에 각자의 길을 찾는 게 바람직하단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원래 심각하고 피터지게 고민하지만 오래 고민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마음가는대로 하는 사람이랄까요.
싱가폴마지막 날에 합의를 봤습니다. 그녀는 왜 하필 여행중에..라고 했지만 저로선 여행중이라 다행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서로에 대해 아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람일이란 모르는 거긴 해도 어쩌면 그와의 마지막여행일 수도 있었기에 여행은 아름답기도 처절하기도 했습니다.
둘다 눈이 벌게져서 힘든 순간도 많았구요. 특히 제가 뼈를 묻을 지도 모를 땅이었던 독일에 갔을 때는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아버님묘소앞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죠. 당신아들과 잘 살아달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당신아들에겐 그렇게 속이 깊고 좋은 아이가 네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까지 하셨는데 결국 유언이기도 한 말씀을 지켜드리지 못한거니까요.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어쨌거나 나름 안정된 미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는 거니까요. 지갑에 얼마의 돈이 들어있는 지 장보러가서 물건값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살던 여자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먹고 살 걱정을 하며 월세방을 전전해야한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들거라는 걸 압니다.
이번 독일에 갔을 때 시어머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나 충격을 받으시고 신랑보다 저를 더 걱정하시더군요.
거기다 너없으면 나는 어떻하냐며 우시는 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제 마음을 돌려보려고 오일내내 무지 애쓰셨는데 제가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릴 사람은 아니잖아요.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어떤 것도 제가 충분히 생각해본 것들이었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게도 어머님은 왜 한국을 가냐고 독일로 돌아오라고 네가 혼자 한국에 가서 무얼 하겠냐고 하시더군요.네 어머님은 자주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잊으시죠.
결국은 받아들이시고 그래 한국으로 가라하시면서도 당신집문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제게 열려있다고 하시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작년에 시누이문제 등등으로 열을 많이 받긴 했어도 시어머님이랑 저랑은 좋은 친구 이상의 교감을 하는 관계니까요.
신랑이 늘 그랬더랬죠 우리엄마는 너보다 좋은 며느리를 만날 수는 없었을거라구요.
심지어 시어머님은 우시면서 네가 함께 살 남자가 있어서 한국에 간다면 당신이 이렇게 반대하지 않겠다고까지 하시더군요.
제가 결혼초 폐인이 되었을 때 그런 저를 안고 이 애는 내 자식이다하셨다구요.
너무나 흥분하신 시어머님은 둘다 당장 독일로 돌아와라 혹은 그렇게 떠도는 게 아니었다 하시지만 떠도는 삶이 저희를 성장시켰고 그 삶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제가 내리는 결정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온 건 아닙니다만 그 결정을 내릴 때는 늘 저로선 최선이었기에 저는 제 인생을 별로 후회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은 결정은 제가 더 나은 인간이었다면 가능했겠죠.
어쨌든 이렇게 짧지 않은 결혼생활을 접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한국에서의 제 삶을 걱정합니다. 특히 제 한국에서의 직장생활 이년을 함께했던 그녀는 '당신은 그때 행복하지 않았고 그때랑 비교 지금도 한국사회는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한국사회에 맞지 않는 사람이란 말은 제가 너무나 자주 들은 말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한국인이 아닌건 아니잖아요. 이젠 정말 틀리지 않는 언어를 쓰고 살고 싶다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답니다.
우선은 가방 두 개만 가지고 떠날 생각인데 제가 소유한 저 어마어마한 것들중에 꼭 필요한 것이 뭔가를 생각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네요.
그러게요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사십년을 꼬박 채워살았는데 삶앞에서는 늘 어린아이같은 심정입니다.
그래도 나름 애쓰면서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점이야 많지만 말입니다.
신랑에게 '나는 당신이 더 늦기전에 다른 여자를 만나 아이도 낳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이때문이 아니라 네가 얼마나 애쓰면서 열심히 살았는 지를 알기때문에 네 이유에 동감하고 너를 보내주는 거다' 하더군요. 참 고마왔습니다.
신랑은 그럽니다.
나는 너없으면 못산다는 말은 못한다. 그래도 어떤 다른 여자랑 살아도 너하고만큼 행복할 수는 없다고요.
예전에 역시 썼지만 제 남자는 제게도 제가 만날 수 있었던 가장 멋진 남편입니다.
신랑과 저는 결국 이혼하게 되더라도 누구보다 좋은 친구로 남을 겁니다. 남자와 여자로서도 그렇지만 인간적으로도 서로를 좋아하고 신뢰하니까요.
그런데 왜 헤어지냐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냥 이게 제가 사는 방식, 아니 제 삶을 견뎌내는 방식입니다.
사실 여행중에는 쿨했는데 막상 도쿄로 와서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카운트다운하며 뭘 챙겨가야하나 하다보니 많이 복잡하고 생각보다 훨씬 힘이 드네요.
'당신이 내린 결론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믿습니다
그동안 너무 수고했다고, 애 썼다고, 이제 좀 쉬라고 그렇게 당신의 어깨를 토닥입니다.'
그녀에게서 온 메일입니다. 제가 여행을 떠나있는 내내 제 걱정만 하고 보냈다더군요.
그녀처럼 제가 선택한 새로운 삶..걱정은 되시겠지만 축복해주세요.
막막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제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서 나름 열심히 살겠습니다.
2007.08.20.Tokyo에서..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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