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묻은 삶

늙어가는 여자의 수다

史野 2007. 6. 7. 13:16

요즘 티비에서 봄의 왈츠라는 한국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나야 한국드라마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지만 일본어 더빙인 관계로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만나게 되면 공부한다는 기분으로 본다.

 

뭐 띄엄띄엄 봤으니까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까진 잘 모르지만 어쨌든 초등학교때 좋아했던 사람들을 계속 좋아하는 뭐 그런 내용이다.

 

나같은 인간은 당연히 저런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니 황당했는데 초딩때가 아니라 결혼 전까지 아니 결혼 후까지 내가 너무나 사랑했다는 그 친구조차 얼굴 안 본 지 6년이 넘은 지금 거의 생각하고 살 지도 않는데다 그 애가 아직도 나를 사랑할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자칭 사랑의 혹은 연애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사랑이란 지나가는 것이다. 지나간다는 의미가 그 사랑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일단 연애를 할 때는 그 사랑에 충실하고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 다는 것.

 

나같이 바람둥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웃기긴해도 그리고 지나보면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헤어졌을 지언정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그 순간엔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 사랑은 늘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곤 했다. 인생에서 열정을 빼면 남는 게 없는 나는 내가 앞으로 내 남자보다 누군가를 훨씬 더 사랑하게 된다면 내 남자를 떠날 것이고 내 남자가 나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전혀 문제(?) 일으키지 않고 보내줄 준비가 되어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걸 알고 난 후엔 더 늙기 전에 내 남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줘야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다. (아 이건 혹 또 지난 글들 전혀 안 읽고 쓸데없는 답글 달아놓으시는 분들 있을까봐 덧붙이지면 꼭 아이문제 뿐 아니라 내 지병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너 아니면 안돼 이런 사랑을 믿지 않고 그냥 사람은 대충 괜찮은 사람 만나서 아이낳고 서로 노력하며 정붙이고 살면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왕재수없는 인간이니까 내 남자가 다른 어떤 여자를 만나도 나하고 살 때만큼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믿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만..ㅎㅎ

 

어떤 식의 행복인가 뭐 꼭 같지는 않겠지만 나는 누구랑 결혼을 했더라도 나름 행복하게 잘 살았을거다.

 

각설하고 그래서 얼마전에 작고하신 피천득선생님의 '인연'이라는 그 유명한 수필이 내게 별 감동을 주지 못한 이유다.

 

아니 어떻게 한 사람을 평생을 그리워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게 사랑이란 자라는 것이지 첫 눈에 반하고 어쩌고가 아니다. 내 남자를 처음 봤을 때 첫 눈에 반하지도 않았지만 사랑에 빠졌던 때보다 십년을 훨 넘게 산 지금 나는 내 남자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한다.

 

그런데 결국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만 이 나이가 되어서 내가 믿지 않던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건 개인의 차이였다는 것.

 

나는 내가 너무 사랑했던 남자를 사랑하지 않던 어떤 남자를 위해 포기한 적도 있고 내가 만나던 남자를 친구가 좋아하면 그럼 너가져라 (무슨 물건이냐..-_-) 한 적도 있는데  나란 인간은 그렇지만 다른 인간들은 진짜로 가슴에 묻어두고 평생을 잊지 못하는 그런 사랑을 하기도 하더라는 거다.

 

내가 고등학교때 만났던 어떤 남자가 거의 십 년만에 나타나서는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앞으로 십 년 후에 나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해서 무슨 이런 미친놈이 있나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게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고 그게 이제야 믿어진다는 거다.

 

그러니 사랑에 울고불고 집착하고 온갖 추태를 부려 내가 한심해 하던 인간들이 어떤 면에서는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절실함 간절함은 내가 여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므로..

 

나는 질투를 모르는데 그건 내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보지 못한 이유는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이런 건가보다. 믿을 수 없었던 이야기가 믿어지는 것.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해가 되는 것.

 

그런 깨달음이 젊음과 바꿔서 얻어진다는 것이 서럽긴 하다만 어차피 산다는 자체가 의문투성이인데 하나씩 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너무나 혹독하게 마흔을 앓고 있는 중이고 내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없어 미치겠다. 어제 어떤 분은 불혹이 되는데 '약간은 긴장되는 내 미래가 가슴벅차게 떨리는 역동적인 미래가될것임에 믿어의심치않으며 자축을한다.'는 글을 남기셨던데 나로선 너무나 부러운 이야기다.

 

결국 어제 한 건 했다.(아니 한 건 더했는데 가슴아픈 이야기는 빼기로 하자..^^;;;)

 

아시는 분 많겠지만 내 인생에 만화는 없었다. 이건 내 엄마의 교육영향이 큰데 만화를 본다거나 오락실을 간다거나 (그런 엄마가 오락실을 몇 달 운영했고 아빠가 아프신 바람에 그 가게를 내가보다가 그 운명같은 옛 사랑을 만났다만..ㅎㅎ) 하는 건 불가능했던 이야기.

 

집안분위기 영향도 있지만 무협지같은 것도 읽어본 적이 없고 미스테리물 공상과학 코미디(나는 사람들이 코미디프로 앞에서 웃는 걸 전혀 이해못한다) 런어웨이 브라이드같은 영화를 보면 허탈해 하는 인간이다.

 

컴퓨터게임도 못해서 스타크래프트가 뭔지를 모른다니까 나를 좋아하던 어떤 남자애가 아주 심각한 얼굴로 누나에게 너무 실망했다고 했더랬다..-_-

 

지난 번 한국갔을 때도 그녀랑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말하자면 괴팍하고 외골수적인 인간으로 늙어갈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진 인간.

 

이것 역시 내가 내 미래를 걱정하는 이유인데 정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나랑 비슷한 인간 마음에 드는 인간이 없다는 것. 왠만하면 내 사는 방식에 잔소리를 안하는 내 남자마저도 이 문제는 미치고 팔짝 뛰는데 '너 좋다는 인간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넌 왜 그렇게 냉정하고 재수없게(frech란 단어인데 정확히는 버릇없는 뭐 그런 뜻이다..-_-)구는 거냐'고 괴로와한다.

 

물론 얼마전에는 자기는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겠지만 자기가 나를 오래보다보니 그렇게 재수없게 굴어도 나 좋다는 사람 여전히 많고 인간관계 문제없더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만..ㅎㅎㅎ

 

문제는 신랑은 이제 걱정안하는 데 내가 걱정이 된다. 여기도 만나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독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머리가 찌끈거리는게 겁도 난다. 불독커플은 넘 멀리살고 내가 주로 만나고 살게 될 친구마누라 여섯 명중 나랑 친구가 될만한 애들이 하나도 없다.

 

지금 런던에 살고 있는 리즈네가 뒤셀도르프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으로 가버리면 암담 그 자체다..ㅜㅜ

 

 

또 각설하고 어제 한 한 건이 바로 이거다..^^

 

퇴근한 신랑에게 현관에서부터 방방 뛰며 내가 오늘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 줄 아느냐고 자랑을 했더니만 부창부수라고 나처럼 만화를 안 좋아하는 신랑은 이게 그렇게 감동적인 일이냐며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던데 나같이 심각한 인간이 좀 즐겁게 살려는 발버둥으로 내 생애 첫 만화를 샀는데 그럼 이게 감동사건이 아니냐니까 그제서야 벅찬 얼굴로 칭찬을 마구 하더라..ㅎㅎㅎ

 

서점에 없어서 두 권이 빠졌다만 한국에서도 왕인기인 노다메 칸타빌레. 사실은 작년에도 다른 사이트에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길래 나도 좀 친해져보고 일본어도 공부할겸  한국어 한 권 일본어 한 권 샀는데 역시나 나는 아니더라는 것. 그 과장된 몸짓이며 한숨만 나왔다..-_-;;

 

그런데 내가 요즘 일본어를 다시 배우러 다니며 차츰 까막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렇다 드디어 문맹에서 발을 빼고 있는 중이다..ㅎㅎ) 일본어로 읽었더니 내가 이해를 하고 있구나란 감동이 합해지면서 느낌이 다르더라는 것.

 

그래 당장 튀어 나가서 저걸 다 사왔다. 그래 한동안 만화에 버닝을 해 볼 생각이다..

 

살다 살다 내 돈으로 만화책을 다 사고 버닝을 할 각오를 다지며 만화리뷰를 뒤적거리고 있다니 新しい人生が始まった...ㅎㅎ

 

 

 

 

2007.06.07. Tokyo

 

 

26272

 

'먼지 묻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그래도 행복한 인간인 이유  (0) 2007.07.05
조카들의 선물  (0) 2007.06.30
기운없었던 주말  (0) 2007.06.04
미친 여행의 노래 2  (0) 2007.05.29
좋은 소식..ㅎㅎㅎ  (0) 2007.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