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에도에 갔을까
2006-03-09
조선 통신사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읽었어도 이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전쟁을 겪고 왜구의 문제며 대마도와의 무역문제며 재침략을 막기위한 선린의 의미였다고 하나 그건 내가 납득할 만큼 아니 부끄럽지 않은 교린의 외교였다는 확신을 주지 않는다.
특히 대마도문제에 있어서는 명과의 무역에서 필요한 은이 들어오는 장소라는 엄청 중요한 의미는 있었으나 실제로 오랑캐와 교역을 하는 것도 창피한 일이라는 게 당시 학자들의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부모의 나라 중국에 가서 무역하는 것은 무방하나, 원수의 나라에 가서 무역하면 섬 오랑캐에게 깔보이고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킨다. 하니. 인조도 옳다고 혀겨 조총과 일본도를 사오려던 계획을 취소시켰다.(p.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관의 규모는 대단한데 부산에 새로 지어진 왜관의 넓이는 일본이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인에게 주었던 땅의 25배 중국인 거주지의 10배였다는 거다. 조선과 일본의 전체면적으로만 비교해봐도 그 의미는 대단하다고 하겠다.
대마도가 그렇게까지 조선에게 중요한 위치였다는 것도 심지어 대마도 눈치까지 살펴야 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이건 대마도와 관련된 왜관이라는 책을 드디어 주문했으니 제대로 확인해 봐야할 중요한 관계다.
이 책에서 저자는 통신사에 대해 일관성없는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예를들면 이렇다.
즉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것은 왜인을 기미하는 정책으로, 야생마같은 오랑캐에게 굴레를 씌우고 고삐를 매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려는 방편이었다.(p.107)
1607년부터 시작된 11번의 통신사 파견 시기를 결정하는 데 있어 조선은 막부나 대마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난 1764년 통신사 파견 때도 조선읜 흉년과 굶주림으로 금주령을 내려야 할 정도로 재정이 어려웠지만 막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는 교린에서 전례와 예를 무엇보다 중시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p. 215)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데 그래도 조선쪽에서는 아무말도 할 수 없을만큼 예가 뛰어나서 울며겨자먹기였다는 말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랑캐를 깔보는 수행원들에 대한 지도부의 권고를 나타내는 한 사행록을 보자.
첫째는, 일행의 상관 이하 마땅히 정숙하고 삼가야 함이 요망되며, 술에 거나게 취하는 것과, 문이나 기둥을 파내거나 자리나 병푼을 베어내며, 당벽에 침을 뱉거나 오줌을 계단에 누는 것이나, 말을 달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든가, 여러 관속들이 상대할 때 고자세로 오만하게 왜인을 내려 보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고, (하략).(p.128)
이런 언급들은 몇 번 나오는데 당시 사행의 어려움과 사행에 임한 사람들의 태도를 이보다 적나라하게 이야기 해줄 수 있는 문구는 없는 듯하다. 이게 과연 교린인가.
이 책이 내용이나 사진이나 사실 별 세개보다는 더 받을 수 있었는데도 내가 이리 야박한건 언급했듯이 저자의 시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출판사의 잘못이 가장 크다. 책표지에는 에도시대 일본에도 이미 '한류'가 있었다는 시류에 편승한 싸구려 문구를 집어넣었는데 이백년동안 12번, 앞 백년이 더 자주 드나들었다고 하더라도 어쩌다 오는 조선통신사들에게 유학자들이 시문이나 좀 부탁했다고 한류가 있었다는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하다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믿음을 나누는 치열한 외교전이었다는데 아무리 읽어도 믿음을 나눈 구석은 눈에 뜨이지 않고 단지 실리가 아닌 체면외교였을뿐 통신사 사절내내 문제가 되었던 쇼군의 칭호에 대한 줄다리기는 메이지유신 후 천황을 정치주체로 내건 메이지정부가 전면으로 나섰을때 조선의 위치를 나약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뿐이다.
하긴 자꾸 언급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그때보다 훨씬 가까와졌고 몇 개월이 아니라 일본어도 완벽했던 모여사께서는 이년이나 살았으면서도 일본은 없다라고 외치던게 겨우 십몇 년 전이니 말이다. 자꾸 써먹어서 미안하지만 이런 상황을 비교하고 가늠하는데는 그보다 적절한 예가 없어서이다.
저자는 맺는 말에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안 된다고 지금 우리가 일제 36년의 기억으로 일본을 보듯이 당시 사람들은 7년전쟁의 기억으로 일본을 보고 있었다는 말을 강조하는데 그 7년의 기억이 이백 년을 갔다면 그건 더군다나 씁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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