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나를 배반한 책
2005-12-17
나는 연애중독자다. 한동안은 그 중독에서 헤어나왔다고 이제 내 가슴은 연애에 관해서만은 사화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나는 다시 가슴 설레이는 그런 연애를 꿈꾸고 있다. (이건 본인의 생각이고 남들에게는 뭐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그 다른표현에 대해선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으련다..^^)
그래서 꼭같은 모습은 아니더라도 이츠지 고지로였던 적도 미나즈키 미우였던 적도 있는 나는, 혹은 수 많은 이츠지와 미나즈키를 보아온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밀려오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뭔가 제목에 맞는 결론이 생기기를 기다렸다.
역자는 소설적 재미를 더하는 반전 어쩌고 하는 대목에서 난 그만 책을 덮을 뻔했다. 이게 어찌 연애중독이야기란 말이냐고 이건 그냥 한 정신병자의 집착이야기지.
내 주변에 남에 대한 해코지조차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믿고 그걸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연애를 한다는 건 가슴이 팔랑거리는 거다. 이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어 왠지 햇살마저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매연 가득한 도시의 공기조차도 싱그럽게 느껴지는 것. 그게 연애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존감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남을 사랑할 수 있을 까. 미나즈키는 말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타인과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 후지타니는 단 한 사람, 타인이 아닌 인간이었다...
이거야말로 그녀가 노예라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내게 더 충격적인 문장이다. 세상에 타인이 아닌 인간은 없다. 그리고 진정한 타인일때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안그러면 나와 그가 (혹은 그녀가)섞여 어찌 서로를 제대로 바라다 볼 수 있단 말인가.
상대를 타인으로서 인정하고 각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썩은 물 속에 갇혀진 두 마리 물고기처럼 그렇게 예정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일 뿐이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신뢰다. 이건 보통 생각하는대로 절대 나아닌 다른 상대는 사랑하지 않을거라는 그런 철없는 믿음이 아니라 상대가 나만큼 자존감을 갖고 있으리란, 그리고 우리는 그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런 신뢰다.
그런 걸 받아들이면 미나즈키 혹은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때 제 삼자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남편이(혹은 아내가) 바람을 피거나 사랑에 빠졌을때 왜 그 상대를 찾아가 난리 부르스를 추는가?
그 관계를 지켜내지 못하는 건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닌 그 두 사람이다.
물론 처음에 언급했듯이 내가 미나츠키나 이츠지를 이해못하는 건 아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는 두 사람은 사실 많이 닮아 있다. 외롭다는 것. 그리고 그 외로움을 이겨낼 내적장치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 그래서 이츠지는 끊임없이 불행한 여자들을 골라 주변 여기저기에 배치해 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언제라도 딱 그 기분에 필요한 상대가 손에 닿는 곳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딸 문제로 실형까지 받은 미나츠키를 또 일년에 몇 번씩 찾아오는 이츠지의 모습에서 더 확실히 읽을 수 있다.
미나츠키는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고 내가 완전히 타인속에 용해되었다고 느낄때 그때서야 자신을 온전하다고 여기는 것이고.. 둘 다 외롭고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진부한 표현을 하자면 연애 역시 끊임없는 노력으로 발전하는 거다. 무조건 저거다 믿고는 물고 늘어지는게 아니라 밀고 당기며 잘 모르던 상대를 조금씩 알아가고 배려하면서 사실은 나를 새롭게 발견해 가는 것이 아닐까.
이게 내가 생각하는 연애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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