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묻은 책장

이현수-신기생뎐

史野 2007. 5. 3. 16:46

이런게 소설이다

 

2006-02-12 14:26

 

 

기생이란 키워드로 검색하다 제목이 흥미로와 골랐던 소설을 단숨에 읽고는 아니 단숨은 아니고 중간 중간 술과 담배연기와 한숨을 섞어가며 읽고는 내 빈약한 국악씨디를 뒤적이다 역시 한숨지으며 겨우 서편제 씨디를 골라건다.

 

소설속 주인공들이 춤을 추고 부용각 건물이 춤을 추고 대숲이 춤을 추고 밤새끓는 뼛국과 하얗게 널린 이불빨래가 엉켜 춤을 추고 무엇보다 이현수의 그 감칠맛나는 언어가 섞여 춤을 춘다.

 

아무리 그래도 오마담의 소리와 미스민의 살풀이 춤은 내 빈곤한 상상력으론 구체화되지 않는다. 뿌옇게 아침안개에 가려 들릴 듯 잡힐 듯 다가오다 사라지는 대신 몇 년전 여름 가마쿠라 한 절에서 보았던 능소화만이 선명해진다. 그리고 만족한다 오마담도 미스민도 한송이 능소화이기에..

 

소화라는 이름의 후궁이 구석진 곳에서 임금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말라죽은 담장자리에 피었다는 꽃이 능소화의 전설이라던가그 전설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여성에게 좋은 한약재로도 쓰인다던가. 아니 그 한이 독이 되어버려 잘못만지면 실명한다던가.

 

붙박이 꽃이 아니라 나비가 되어 이 품 저 품에 안기는 기생의 팔자가 한 남자만을 기다리는 능소화와 어울리는 이 역설을 간파한 저자의 역량이 이 소설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제대로된 명함 한 번 내밀지 못하는, 삼사천원짜리 화분을 향한 소박한 꿈마저도 자의건 타의건 포기해야하는 이들의 운명앞에서 느껴지는 내 속의 이 패배감의 근원은 뭘까. 아니 속을 차고 올라오는 부러움이라고 해야 솔직하려나.

 

반백년을 기방 부엌어멈으로 살아온 박색에 입도 걸한 타박네에게서 느껴지는 그 자부심과 반듯함, 오는 사랑 막지 않고 가는 사랑 잡지 않고 퇴물기생으로 끝까지 버티며 마당에 내동댕이쳐저도 이게 기생이려니 담담한 오마담에게서 느껴지는 기품, 소리에 눈이 멀어 아니 능소화독에 눈이 멀어 한 여자만을 그리워하며 온갖 궂을 일을 하면서도 떨리는 발걸음으로 꿀물을 바치는 박기사의 순정..국악고등학교를 나오고 무형문화재를 전수받다 부용각을 이끌 새 기생이된 미스민의 앙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기백..

 

그들의 뼈마디에 구구절절히 새겨진 사연이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의 그들의 처지가 애처롭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니스칠하지 않고 초칠과 세월만으로 빛과 향기를 발하는 부용각의 마루처럼 그렇게 나름의 색을 내며 자리매김할거라는 근거없는 안심이 들게 하는 사람들

 

삶을 배반하지 않고 온 몸으로 자기 몫을 살아낸 자들에게만 풍기는 향이 묻어나는 이 소설은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한 인생 제대로 사는 것이냐는 근본적인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한국어가 이렇게 아름답고 풍성하고 신명나는 언어라는 걸 경험할 수 있다니 이현수의 언어는 미스민이 화초머리를 올리던 날 추던 살풀이 춤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고 유머스럽다가 애잔하고 눈살이 찌푸러지게 걸하기도 하고 어지러울만큼 현란하기도 하다.

 

씨디는 끝이 났는데 내속에선 다시 언어와 선명한 능소화와 살풀이춤과 고음이 올라가지 않은 오마담의 소리에 흔들리는 대숲소리까지 뒤섞여 출렁거린다.

 

그리고 기다린다..영준이 부용각을 찾아올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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